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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65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고사성어로 본 항우의 일생

기원전 3세기에 시작되어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승패를 겨루고 있는 전쟁이 있다. 바로 초한전쟁이 그것으로 우리가 두는 장기판 위에서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만큼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쟁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비록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통일을 이뤘지만 사람들은 항우의 패배에 아쉬움을 갖고 있다. 항우(項羽)는 초나라의 대장군 항연의 손자로, 우(羽)는 자(字)이며 이름은 적(籍)이다. 모든 조건에서 유방 보다 한 수 위에 있었던 항우는 자신의 용맹함을 과신하고 독선과 아집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의 리더였다. '일거양득'과 '사면초가'는 항우 인생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사성어라고 할 수 있다. '일거양..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곧은 낚시로 때를 기다린 강태공과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강태공(姜太公)은 대략 기원전 12 세기경,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에 의해 발탁되어 그의 아들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주나라 건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강상, 여상, 강여상, 태공망, 백가종사 등의 이름과 별칭으로도 불리는 강태공은 기다림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반계수조(磻溪垂釣) ', 즉 위수 강변 '반계'라고 하는 곳에서 곧은 낚시를 드리운 채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일화는 유명한데, 그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을 넘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낚시를 하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을 강태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반계수조'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를 자신의 호(號)로 삼았으며, 자신이 쓴 책에 '반계수록'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강..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고사성어로 본 한신의 일생

병선(兵仙), 즉 군대를 운용하는 용병의 신선으로 불리는 한신은 초(楚)나라 출신으로 원래는 항우 밑에 있었으나 그 곳에서는 자신의 포부를 이룰 수 없을 것 같자 한(漢)나라 유방의 진영으로 옮겨갔다. 소하의 추천으로 한나라 대장군이 된 한신은 탁월한 능력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최후에는 해하에서 초패왕 항우를 물리침으로써 한 고조 유방이 진(秦)을 잇는 통일제국을 이루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신은 군수와 행정을 담당했던 소하, 전략가인 장량과 더불어 '서한삼걸(西漢三傑)'로 불리며 초한전쟁에서의 공을 인정받기도 했으나, 결국엔 모반을 획책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해 토사구팽의 대표적 사례가 되기도 했다. 한신은 많은 고사성어를 만들어 냈는데, 그 만큼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인생 2막을 개척한 미녀 왕소군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흉노는 한(漢)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기 전부터 이미 북방의 강국이었다. 한나라가 비록 진(秦)나라의 뒤를 잇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수립했지만, 북방 흉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한 고조는 한 때 흉노 정벌에 나서기도 했으나 참패한 뒤, 다시는 흉노와의 전쟁을 벌이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왕실의 공주를 흉노의 왕인 선우에게 시집 보내는 혼인 정책이나 조공으로 그들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중국 4대 미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왕소군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가 흉노 땅에서 일생을 마친 여인이다. 그녀가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땅으로 갈 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고 날..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고사성어로 본 한비자의 사상

기존의 질서는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화 되었던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개인이든 국가든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난세였다. 기원전 3 세기 한(韓)나라 왕실의 서자로 태어난 한비자는'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데, 그의 사상의 핵심은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법치주의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한비자는 이상주의자인 유가와 대척점에 섰던 인물로, 법가 사상을 완성했다. 그러나 한비자가 강조한 법치는 오늘날의 법치와는 달리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따라서 군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법은 가혹하고 두려운 족쇄였다. 한비자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은 진시황은 법치를 통치의 기본원리로 삼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뤘지만, 혹독한 법 집행과 형벌로 몰락을 자초하니 이는 법..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꾀 많은 괴짜 식객 풍환과 교토삼굴(狡兎三窟)

전쟁이 일상화 되고 나라의 생존이 불확실했던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는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일부 왕족들은 수천 명의 인재를 자신의 집에서 식객으로 거느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은 전국 사군자 또는 사공자라고 불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은 기원전 3세기 제나라의 왕족으로, 이름은 전문(田文)이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의탁했던 수많은 식객 가운데 한 명으로, 맹상군이 식객을 잘 대우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맹상군은 그가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식객으로 받아주었다. 풍환은 좀 별난 식객이었다. 맹상군은 처음에 그를 3등 숙소에 배치했는데, 풍환은 고기반찬이 없다고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너무 총명해서 화를 당한 양수와 계륵(鷄肋)

'계륵(鷄肋)'은 '닭의 갈비'라는 의미인데,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부위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취하자니 별 이득은 없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비록 작은 이득이지만 아까워 망설이게 되는 경우,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을 비유하는 말이다. '계륵'이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하게 한 사람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왕 조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계륵'을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만든 이는 조조의 책사인 양수라고 하겠다. '후한서 양수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한 말 위, 촉, 오 삼국의 형세가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 위왕 조조는 촉의 유비와 한중이라는 지역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던 전투는 어느 순간 조조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밀고 들어가자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세계 최초의 미녀 간첩 서시와 동시효빈(東施效矉)

와신상담(臥薪嘗膽),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기도 했던 오나라와 월나라의 복수혈전은 고대 중국에서 춘추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열리는 분수령이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서시(西施)는 월왕 구천에 의해 오왕 부차에게 미인계로 보내져 오나라가 망하는데 일조한 여인으로, 아름다운 용모를 바탕으로 한 여러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미녀 서시는 가슴앓이가 있어 가끔씩 통증을 느끼곤 했는데, 이 때 손을 가슴에 대고 얼굴을 찌푸리는 그녀의 모습 조차도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서시의 이런 행동을 본 추녀 동시(東施)는 자신도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예뻐 보일 수 있을까 해서 흉내를 냈지만 동시의 못난 얼굴은 더욱 추해 보일 뿐이었다. 이처럼 못생긴 동시가 아름다운 서시의 외모나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촌철살인의 작은 거인 안영과 이도살삼사 (二桃殺三士)

안영은 기원전 6세기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 등 3대 군주를 섬긴 명재상이었다. 안영은 키가 140c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였으나, 지혜가 뛰어났고 현실정치에 밝았으며, 특히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춰 말을 적절하고 부드럽게 잘 해 어려운 문제도 상대방과 다투지 않고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고 겸손해 백성들의 신망이 높아 군주 조차도 안영을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안영은 '안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공자는 "안자를 위한 일이라면 그의 마부가 되어 채찍을 드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만큼 안영을 흠모했다. 또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관중과 안영을 한 편으로 묶은 '관안열전'을 열전의 첫 편인 '백이..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작은 조짐에 큰 위기를 예감한 기자와 견미지저(見微知著)

기자(箕子)는 기자조선설, 기자 동래설 등과 관련해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기원전 12세기경 고대 중국 은(상)나라 말기에 기자, 비자, 미자라는 세 명의 어진 현인이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하자 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 기자 동래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자 동래설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고학적 사료가 없는데다, 일부 역사서는 후대에 조작된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견미지저(見微知著)'라는 고사성어는 일의 미세한 조짐을 보고(見微, 견미) 나아갈 방향이나 나타날 결과를 안다(知著, 지저)는 뜻으로, 사소한 것에서 장차 벌어질 큰 일을 예감한다는 의미이다. '견미지저' 고사성어를 이야기 할 때면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