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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인생 2막을 개척한 미녀 왕소군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물아일체 2022. 8. 16. 08:10

흉노는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기 전부터 이미 북방의 강국이었다.

 

한나라가 비록 진()나라의 뒤를 잇는 강력한 

통치체제를 수립했지만, 북방 흉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한 고조는 한 때 흉노 정벌에 나서기도 했으나

참패한 뒤, 다시는 흉노와의 전쟁을 벌이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왕실의 공주를 흉노의 왕인 선우에게

시집 보내는 혼인 정책이나 조공으로 그들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중국 4대 미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왕소군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가 흉노 땅에서 일생을 마친 여인이다.

 

그녀가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땅으로 갈 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고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버려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기원전 33 년, 흉노의 왕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

원제를 방문해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하고,

자신의 딸 대신 궁녀 가운데 한 명을 골라 공주로

신분을 위장하기로 했다.

 

그래서 원제는 궁중 화공인 모연수가 그린 궁녀들의

초상화를 보고 그 중에서 흉노의 선우에게 주어도

아깝지 않을 못생긴 궁녀를 골라냈으니, 그녀가 바로

왕소군이다.

 

원제는 평소 화공인 모연수로 하여금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 필요할 때마다 그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하룻밤을 즐기곤 했다.

 

이에 황제의 승은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다투어 뇌물을 바치며 자신의 얼굴을

아름답게 그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왕소군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

미모에 자신도 있었고, 또 워낙 가난해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자 이를 괘씸하게 여긴 모연수는 왕소군을

얼굴에 점까지 있는 추한 모습으로 그려 버렸다. 

 

이윽고 미녀 아내를 맞게 되어 한껏 기분이 좋아진

흉노의 호안야 선우와 왕소군 일행이 북쪽 흉노의

땅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이들을 배웅하러 나왔던 원제는 왕소군의 실제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초상화에서는 추한 모습이었는데, 실물을 보니

전혀 딴판인 절세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흉노의 호한야 선우의

아내가 되어 떠나는 왕소군을 어찌 할 수는 없었다.

 

화가 난 원제가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궁중 화공인

모연수가 뇌물을 받고 초상화를 실물과 다르게

그려 온 사실이 밝혀졌고, 원제는 모연수를 처형했다.

 

후대의 중국 한족들은 왕소군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며 애통해 했지만, 흉노의 땅으로 간 왕소군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슬프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맞은 제 2의 인생을

기회로 삼아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가부장제 영향을 적게 받은 북방 유목민족들은

당시 한족들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게다가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첩이 된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부인을 의미하는 '알지'에 봉해졌는데,

'알지'는 중국의 황후보다도 권한이 막강했다.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과 재혼한 지 3년 만에 죽고,

선우의 지위는 전처 소생의 장남 복주누약제에게

승계되었다.

 

선우가 된 복주누약제는 흉노의 수계혼 전통에 따라

왕소군을 아내로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처첩을 자식이 물려받는 수계혼은

지금은 물론 당시 한족의 생각으로도 패륜이기에

이를 왕소군의 비극으로 보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의 사회에서는 자신을 낳은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을 아들이 들이는 것은 가장이 죽었을 때

거친 환경에 홀로 남겨진 미망인과 어린 자식들을

보살핀다는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왕소군은 복주누약제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낳고 살면서 흉노족에게 다양한 한족 문화를 소개하는

한편, 여인들을 위해서는 길쌈 기술을 가르쳤다.

 

이에 왕소군은 흉노족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그녀가 생존했던 기간 동안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는

단 한차례의 전쟁도 없었다.

 

그녀가 흉노의 땅에서 60년 동안 살다 생을 마감하자

흉노족은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무덤에

'푸른 무덤'이라는 의미인 '청총(靑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왕소군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과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

당나라의 문인 동방규가 지은 '소군원(昭君怨, 왕소군의

원망)'이라는 시이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소군원'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유래된 '춘래불사춘'은

절기로는 분명 봄이지만 봄 같지 않은 추운 날씨가

이어질 때도 쓰이지만, 좋은 시절이 왔어도 상황이나

마음이 아직 여의치 못하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더 자주

인용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우리 나라는 민주화라는 '서울의 봄'을 맞는 듯 했다.

그러나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시민들의 들끓는 민주화 요구를 짓밟았다.

이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당시의 과도기적 정치

상황을 '춘래불사춘'으로 표현했던 일은 유명하다.

 

2022년 3월, 좀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며 어렵사리

정권교체를 이룬 우리 국민들에게도 '춘래불사춘'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이 제대로 자리잡고 민생경제가

회복되는 진정한 봄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