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일상화 되고 나라의 생존이 불확실했던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는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일부 왕족들은 수천 명의 인재를 자신의 집에서
식객으로 거느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은 전국
사군자 또는 사공자라고 불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은 기원전 3세기 제나라의 왕족으로, 이름은
전문(田文)이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의탁했던 수많은 식객 가운데
한 명으로, 맹상군이 식객을 잘 대우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맹상군은 그가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식객으로
받아주었다.
풍환은 좀 별난 식객이었다.
맹상군은 처음에 그를 3등 숙소에 배치했는데,
풍환은 고기반찬이 없다고 늘 투덜댔다.
그래서 2등 숙소로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는
외출할 때 타고 다닐 수레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이에 1등 숙소를 배정하고 수레도 제공해 주자,
풍환은 다시 단독으로 머물 수 있는 집이 없다며
투덜댔다.
결국 그는 집까지 제공받아 어머니를 모셔와
봉양하며 맹상군의 식객 노릇을 하게 되었다.
재상인 맹상군은 3천여 명에 이르는 식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그의 영지인 산동성 설 땅의
농민들에게 고리대금을 놓아 그 이자 수익으로
비용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흉년이 들자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맹상군은 누구를 보내 빚 상환을 받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풍환이 자청했으므로 그를 보내기로 했다.
풍환은 출발에 앞서 맹상군에게 “빚을 받으면 무엇을
사올까요?” 하고 물었다.
맹상군은 “무엇이든 이 집에 없는 것을 구해오게.”라고
대답했다.
설 땅에 도착한 풍환은 농민들의 빚 문서를 하나하나
살피더니 “맹상군께서 여러분의 어려운 생활을 아시고
빚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농민들의 차용증을 거두어 불태워버렸다.
더불어, 일부 상환 받은 돈으로는 잔치를 열어 농민들이
실컷 먹고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설 땅의 사람들은 감격해 "맹상군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고, 맹상군의 명성은 설 땅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높아졌다.
집으로 돌아온 풍환에게 맹상군이 물었다.
"그대는 나를 위해 뭘 구해 왔는가?"
이에 풍환이 대답했다.
"주군의 저택에는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져 있으나,
다만 한 가지 의(義)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걸 사 왔습니다."
맹상군이 "그게 무슨 소린가?" 하고 재차 물으니,
풍환은 농민들의 차용증을 모두 불살라 버림으로써
의(義)를 사 왔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맹상군은 기가 막히고 화도 났으나, 자기가 했던
말이 있기에 나무랄 수도 없어 속으로 화를 삭여야만
했다.
1년 후 맹상군은 제나라의 새로 즉위한 왕에게
미움을 사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疎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이익과 권세로써 모인 사람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떠나간다.
맹상군에게 의탁하던 3천여 명의 식객들은 모두
뿔뿔이 떠나버렸다.
그러나 풍환은 맹상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맹상군에게 영지인 설 땅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할 것을
권했다.
가산을 정리해 설 땅에 도착한 맹상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지의 농민들이 모두 몰려나와 그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감격한 맹상군은 풍환을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대가 '의(義)'를 샀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겠네."
맹상군이 고마워하며 칭찬하자, 풍환이 말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영리한 토끼는 위험에 대비해
굴을 세 개나 뚫어 놓지요.
이제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입니다.
주군을 위해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풍환은 위(魏)나라 왕을 찾아가 맹상군을
등용하면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고, 동시에
제나라를 견제할 수도 있다고 역설했다.
풍환의 말에 공감한 위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해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제나라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제서야 맹상군의 가치를 알아본 제왕은 맹상군에게
다시 재상의 직위를 복직시켜 주었다.
두 번째의 굴이 완성된 셈이다.
두 번째의 굴을 파는데 성공한 풍환은 세 번째 굴을
파기 위해 맹상군에게 제왕을 설득해 설 땅에 제나라
선대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
선대의 종묘가 맹상군의 영지에 있게 되면 장래에
왕의 마음이 변한다 해도 맹상군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반영된 것이었다.
설 땅에 제나라 종묘가 세워지자 풍환이 맹상군에게
말했다.
“이것으로 세 개의 굴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주군은 고침안면(高枕安眠), 베개를 높이하고
편히 잠을 주무십시오.”
이리하여 맹상군은 재상에 다시 오른 뒤 십수 년 동안
별다른 화를 입지 아니했는데, 이것은 모두 풍환이
맹상군을 위해 세 개의 굴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교토삼굴(狡兎三窟), 꾀 많은 토끼는 위기에 대비해
굴을 세 개나 파놓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은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위기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기에 대처하는 교토삼굴의 지혜를
늘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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