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삶의 지혜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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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65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조조의 '조조삼소(曹操三笑)'

AD 3 세기 초 후한 말 삼국시대,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출전한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뒤, 겨우 군사 1천여 명과 함께 이릉으로 향했을 때의 일이다. 급하게 퇴각을 하던 조조가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측근 장수가 대답했다. "오림 서쪽, 의도 북쪽입니다." 조조가 지세를 살펴보니 험준하고 숲이 울창했다. 이때 조조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군들이 웃는 이유를 묻자 조조가 말했다. "주유는 책모가 없고, 제갈량은 지혜가 부족함을 비웃었네. 나라면 이곳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네" 그런데 조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쪽에서 복병이 쏟아져 나왔고, 적장 조자룡이 크게 외쳤다. "군사 제갈량의 영을 받들어 너희들을 기다린 지 오래됐노라!" 갑작스런..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진혜왕과 진진, 항우의 '일거양득(一擧兩得)'

고대 중국 전국시대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서로 싸운 지 일 년이 넘도록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이들 나라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자 어떤 신하는 주선하는 편이 낫다고 하고, 또 어떤 신하는 주선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혜왕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었는데, 이때 마침 진진(陳軫)이라는 초나라 사신이 진나라를 방문했다. 이에 혜왕이 진진에게 물었다. "한나라와 위나라의 싸움을 화해시켜야 하겠는가?" 이에 진진이 대답하였다. "옛날에 변장자(卞莊子)라는 힘센 사람이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여관 근처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변장사는 당장 호랑이를 잡으러 나가려고 서둘러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자 여관에..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이곡과 관우의 '낭중취물(囊中取物)'

'낭중취물(囊中取物)'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 오는 것처럼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 또는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쉽다', 또는 '누워서 떡 먹기'라는 우리말과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낭중취물'은 중국의 5대 10국 시대 때 산동성 지역에 사는 절친한 친국 사이인 한희재와 이곡이라는 사람의 대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5대 10국 시대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 송나라가 건국 될 때까지의 혼란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일컫는다. 후당 명종때, 한희재가 강남의 오나라로 떠나게 되자, 이곡은 그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송별을 아쉬워했다. 술을 마시면서,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희재가..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풍도의 '구화지문(口禍之門)'

"세 치 혀 밑에 도끼가 놓여 있다.", "세 치의 혀가 여섯 자의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의 위험성을 표현하는 속담들이다. 말로써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출세를 하기도 하지만 낭패를 보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설화(舌禍)를 당하기도 한다. 지혜롭게 사용하면 유용하지만 함부로 사용하면 더없이 흉측한 무기로 변하는 것이 우리 입 속의 세 치 혀이자 말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혀 밑에 든 도끼뿐만 아니라 손가락 끝의 도끼도 그에 못지 않은 흉기가 되고 있다. 인터넷과 SNS가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 자리잡은 때문이다. 준 사람은 금방 잊어도 받은 사람은 평생 못 잊는 것이 말이다. 말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칼로 베인 육신의 상처보다 훨씬 깊고 아프고 오래간다. "조적조, 조..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연 소왕과 곽외의 '천금매골(千金買骨)'

중국의 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은 기원전 1세기 한나라의 학자 유향이 고대 중국 전국시대에 활동한 유세가들의 말과 글, 일화 등을 엮어 만든 역사서이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견융족의 침입으로 호경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때로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대를 중국 역사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에 쓰인 '춘추'와 '전국'이라는 명칭은 공자가 엮어 만든 와 유향이 지은 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314년, 연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이웃한 제나라가 공격해와 땅을 뺐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른 연 소왕은 내란을 평정하고 잃었던 땅을 찾고자 인재를 찾는 공고를 냈다. 그러나 별 성과가 없자 연 소왕은 곽외라는 사람을 불러 인재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곽외는 연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대장군 한신의 책사 괴통의 '척구폐요(跖狗吠堯)'

'척구폐요(跖狗吠堯 발바닥 척, 개 구, 짖을 폐, 요임금 요)'란 '도척의 개는 성군인 요임금을 보고도 짖는다'는 뜻으로, 개는 자기가 섬기는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도척의 개'라는 뜻의 '도척지견((盜跖之犬)' 또한 '척구폐요'와 같은 의미의 사자성어인데, 자기에게 도움을 주거나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맹종하는 사람을 빗댄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도척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백성을 유린하고 약탈을 일삼으며, 인육으로 회를 뜰 정도로 잔인해 악명이 높았던 도둑이다.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 쓴 역사서 에 나오는 일화이다. 초한전쟁에서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한 뒤, 개국공신의 한 사람인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이에 유방은 즉시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제갈량의 '탄금주적(彈琴走賊)'

AD 228년,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유비의 뒤를 이은 어린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를 치기 위해 출정한 1차 북벌 때의 일이다. 제갈량의 군대는 마속 장군의 경솔한 작전으로 군사적 요충지인 가정을 위나라 군에 빼앗기자 서둘러 철수준비를 했다. 제갈량은 모든 장수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린 다음, 남은 5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西城)으로 가서 군수 물자 운반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때 위군 대도독 사마의가 1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으로 공격해 온다는 그 급보가 전해졌다. 당시 서성에는 장수는 한 명도 없고 단지 문관이 인솔하는 5천의 병력이 있었는데, 그나마 절반은 군량을 수송하러 나가는 바람에 성안에는 겨우 2500명 정도만 있었다. 소식을 들은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명령..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소유자(少孺子)와 장자(莊子)의 '당랑포선(螳螂捕蟬)'

중국 한(漢)나라 때의 학자 한영(韓嬰)이 쓴 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 왕 수몽은 싸움을 무척 좋아하여 자국의 강대한 군사력만 믿고 이웃 나라를 수시로 침략하곤 했다. 그로 인해 오나라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곳간은 비어 나라가 멸망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왕은 또 다시 인접해 있는 강대국인 초(楚)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신하들은 상황이 오나라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 출병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오왕이 출병을 막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는 엄명을 내리자 대신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이때 소유자(少孺子)라는 신하가 뜻을 굽히지 않고, 왕의 출병을 막을 방책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매일 아침 일찍 활과 화살을 들고 왕궁 후원에서 옷을 흠뻑..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조나라 조괄 장군의 '지상담병(紙上談兵)'

기원전 3세기,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일이다. 강대국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치기 위해 출병했다. 양측의 군대는 장평에서 맞섰다. 조나라에서는 염파 장군으로 하여금 진나라 군대에 대적하게 했다. 염파의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싸움을 걸어와도 응전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키기만 했다. 그런데, 조나라 효성왕은 조급하고 식견이 없는 인물로, 빨리 성과를 내라고 닦달했지만 염파 장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염파 장군은 진나라 병사들이 먼 길을 왔기에 보급이나 피로도의 측면에서 시간을 끄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초조해진 진나라는 조나라 명장 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해 첩자를 풀어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것은 염파 장군이 아니라 조괄 장군이라고 헛소..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포청천과 '철면무사(鐵面無私)'

중국 송나라의 수도 카이펑부(開封府, 개봉부)의 부윤이었던 포청천의 본래 이름은 포증(999 - 1062년) 이다. 포증은 공정하고 강직하며 사사로움이 없이 백성들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였기에 백성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희망을 주는 푸른 하늘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포청천(包靑天)이라 불렀다. 포청천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일을 공명정대하게 수행하고 추호의 비리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자기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던 청백리였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세가들의 탐욕과 비리를 엄하게 다스린 포청천의 일화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소설, 연극, 드라마로 되살아나고 있다. 1994년 국내 TV에서 방영된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그가 던지는 마지막 호령 "개 작두를 대령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