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삶의 지혜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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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65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공자와 안회의 '단사표음(簞食瓢飮)'

공자가 말하였다. “어질도다, 안회여. 대그릇의 밥 한 그릇을 먹고 표주박의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누추한 곳에 살면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어 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유래한 '단사표음(簞食瓢飮)'은 '대그릇의 밥 한 그릇과 표주박의 물 한 모금'이라는 뜻으로, 아주 소박하고 청빈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안회는 평생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지만,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그런 안회를 보고 공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명회와 '송도계원(松都契員)'

한명회는 에 무려 2천여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한 시대 역사의 주역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해 불우한 초년을 보냈다. 그는 벼슬도 없이 허송세월 하다가 3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상들의 음덕으로 관직을 얻는 음서를 통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그에게 주어진 벼슬이라는 것이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렀던 개성, 즉 송도의 경덕궁을 지키는 궁지기 자리였다. 송도에서 경덕궁지기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해 명절 휴일에 개성부 산하 관리들이 송악산 만월대에서 큰 연회를 열었는데, 한명회 역시 고관들과 친분을 쌓을 요량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 사람이 제안했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 살던 벗들로, 멀리 개성에 와서..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노숙과 여몽의 '괄목상대(刮目相對)'

여몽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오(吳)왕 손권 휘하의 장수이다. 그는 주유와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 대도독이 되었으며, 관우가 지키던 형주를 빼앗은 장수로 유명하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오로지 무술에만 힘을 쏟았을 뿐, 글공부는 한 적이 없어 주변으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 여몽이 주군인 손권으로부터 공부 좀 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장에 나가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그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어느 날 대도독이 된 노숙이 여몽의 군영을 지나게 되었다. 노숙은 마음속으로 여몽을 여전히 경시하고 있었는데, 측근 한 사람이 노숙에게 말했다. “여몽 장군의 공명이 나날이 빛나고 있으니 이제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한번 가서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나라 유세군과 '오손공주(烏孫公主)'

오손공주(烏孫公主)는 '오손으로 시집을 간 공주'라는 뜻으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략결혼은 특별한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는 결혼을 일컫는 것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왕실 또는 유력 가문이 결혼을 통해 제휴를 한 경우는 많다. 유명한 정략결혼으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루이 16세의 결혼을 들 수 있다.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고대 중국에서는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정략결혼이 자..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조조와 유비의 '종호귀산(縱虎歸山)'

유비는 여포의 배신으로 근거지인 서주를 빼앗긴 뒤 허창의 조조를 찾아가 의탁하고자 했다. 그러자 조조의 책사 가운데 한 사람인 정욱이 말했다. "유비는 큰 뜻을 지닌 영웅의 기개가 있습니다. 지금 그를 죽이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반면, 조조의 또 다른 책사인 곽가는 정욱의 말에 반대하며 말했다. "의탁해온 힘없는 유비를 명분도 없이 죽인다면 승상의 명예가 손상되고,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어 훗날 대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두 책사의 상반된 진언에 조조는 곽가의 의견을 따라 유비를 기꺼이 맞이하여 환대했다. 이듬해, 원술이 옥새를 가지고 기주의 원소를 찾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권하려 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유비는 이 기회에 조조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고 조조에게 말..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세종과 황희의 '계란유골(鷄卵有骨)'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는 청렴한 생활을 하다 보니 관복도 한 벌밖에 없었으며,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 이런 황희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던 세종은 어느 날 새벽에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저녁에 성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동안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모두 사서 황희에게 보내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가 종일토록 멈추지 않아 성문을 드나드는 상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문을 닫으려 할 때쯤 한 사람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궁문지기들은 하는 수 없이 그 계란 한 꾸러미를 사서 황희 정승댁에 전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달걀들은 전부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고,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못내 탄식해 마지..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초 선왕과 소해휼의 '호가호위(狐假虎威)'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선왕 때 소해휼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초나라의 북쪽에 있는 한(韓), 위(魏), 조(趙) 등 세 나라는 한결같이 소해휼이 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초나라의 선왕은 이들 나라가 왕인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인 소해율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문에 은근히 화가 나 신하들에게 물었다. “듣자 하니 북쪽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소해휼 재상을 두려워한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왕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라 신하들 가운데 누구 하나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강일이라는 신하가 나서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호랑이가 모든 짐승들을 잡아 먹이로 하다가 하루는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죽지 않으려 꾀를 내어 말했습니다. ‘호랑이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황개의 '고육지책(苦肉之策)'

고육지책(苦肉之策)은 병법 36계 가운데 서른네 번째 계책인 고육계(苦肉計)와 같은 말이다. 고육지책 또는 고육계는 내 몸을 상하게 하여 거짓으로 적을 속이는 계책으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내가 받을 고통의 크기를 먼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적을 속이기 위해 제 몸을 상해가면서까지 꾸며내는 고육지책에 자원하는 사람은 투철한 충성심과 사명감이 필요하다. 한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 오나라 왕 합려의 자객 요리(要離)의 고육지책은 유명하다. 사촌인 오왕 요(僚)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합려는 요의 아들인 경기(慶忌)가 후환이 될까 걱정이 컸다. 이때 합려의 신하 오자서가 요리라는 자객을 추천했는데, 요리는 경기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접근하기 위한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이밀과 '반포지효(反哺之孝)'

이밀은 AD 3세기경 중국 진(晉)나라 사람이다. 진나라는 삼국시대 위왕 조조의 책사였던 사마의 (중달)의 손자 사마염(무제, 武帝)이 삼국을 통일할 즈음에 세운 나라이다. 이밀은 원래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했던 인물인데,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네 살 때 어머니도 재가하여 조모 유씨 손에 자라 조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 촉한이 유비의 아들 유선 때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진의 황제 무제(사마염)는 이밀의 학문과 인품을 높이 사 그에게 벼슬을 주려 하였다. 그런데, 이밀에게는 90세가 넘은 조모가 있었다. 이밀은 황제의 명을 따를 수 없는 사정을 글로 적어 무제에게 올렸으니 이것이 유명한 이다. “신 밀은 올해 마흔넷이고 조모는 96세이니, 신이 폐하께 절의를 다 할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항우와 한생의 '목후이관(沐猴而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시황제가 죽은 뒤, 진승 오광의 난을 계기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항우는 숙부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세우고 회왕을 옹립했는데, 회왕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항우가 거록에서 진나라 군대와 맞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을 향해 나아갔고, 항우에 앞서 함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유방은 궁 안에 있는 엄청난 재물과 미녀들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지만, 번쾌와 장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궁궐을 온전히 보존한 채 함양에서 군대를 철수해 인근 패상에 주둔했다. 한편, 거록에서 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항우는 서둘러 관중으로 향했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