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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나라 유세군과 '오손공주(烏孫公主)'

물아일체 2023. 7. 10. 04:00

오손공주(烏孫公主)는 '오손으로 시집을 간 공주'라는

뜻으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략결혼은 특별한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는 결혼을

일컫는 것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왕실 또는 유력 가문이 결혼을 통해 제휴를 한 경우는

많다.

 

유명한 정략결혼으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루이 16세의 

결혼을 들 수 있다.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고대 중국에서는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정략결혼이 자주 이용되었다.

유세군은 한나라 무제의 딸로 신분을 위장해 흉노족과

적대관계에 있던 중국 서쪽의 투르크계 오손족 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오손공주'는 그녀를 이르는 말이다.

 

한나라 초기 중국의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족은

서쪽의 오손족보다 강했으며, 자주 한나라를 침입했다.

한무제는 한고조 유방 이래 줄곧 펼쳐 왔던 흉노족에

대한 화친정책을 강공책으로 바꾸고, 오손족과 함께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장건을 사신으로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는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도왕

유건의 딸 유세군을 자신의 딸이라고 속여 오손족의

왕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다.

 

 

나이 차이도 많은 늙은 오손 왕에게 정략적으로 시집을

간 유세군은 말도 통하지 않는 오손에서의 슬픔을 담은

'오손공주 비수가(烏孫公主 悲愁歌)'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한나라에서 나를 시집 보내니

아득한 하늘 끝이어라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니 오손왕이로다
천막이 집이 되고, 모포는 담장이 되었으며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네
밤낮 고국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하니
누런 고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파"

 

이 노래를 전해 들은 한무제도 유세군을 가엾게 여겨

해마다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수년이 지나 더욱 노령이 된 오손왕은 유세군을

다음 왕위를 이을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보내려 했다.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처첩을 그 후손이 물려받는

수계혼 전통은 당시 유목민족들에게는 당연한

풍습이었지만, 유세군에게는 패륜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유세군은 한나라에 사자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귀국하게 해 달라고 한무제에게 청원하였으나,

무제는 끝내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유세군은 오손왕의 손자의 아내가 되어

딸을 낳고 살다가 한나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오손 땅에서 생을 마쳤다.

이상은 <한서 서역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오손공주 이야기는 흉노족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고사성어를

유래하게 했던 왕소군의 경우를 떠올리게 한다.'

 

 

오손공주 유세군과 왕소군, 두 여인은 모두 한나라 때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공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인물들이다.

 

다만, 왕소군이 흉노족 왕에게 시집을 간 반면,

유세군은 흉노와 적대관계에 있던 오손족 왕에게

시집을 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여인은 먼 이역 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평생을 살았으며, 본래의 남편이었던 왕이 죽은 후

유목민족의 수계혼 전통에 따라 아들 또는 손자와

또 다시 결혼을 해야 했던 비련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이성이 발달하고 지적 수준이 높아진

오늘날에는 정략결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듯 하다.

 

언론을 통해 정,관,재계의 유력인사 자제들의 혼사

소식을 접하게 되면 정략결혼의 느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1988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노태우 대통령의

딸 노소영씨와 SK그룹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원씨의

결혼은 정경유착 논란까지 있었다.

 

한동안 금슬 좋게 잘 사는 것으로 알려졌던 두 사람은

최태원 회장의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혼 절차를

밟게 되었는데, 그 과정 또한 원만하지 못한 모양이다. 

재판정을 나서는 노소영씨의 착잡한 표정에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 오손공주'

고사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