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는 청렴한 생활을
하다 보니 관복도 한 벌밖에 없었으며,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
이런 황희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던 세종은 어느 날
새벽에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저녁에 성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동안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모두 사서 황희에게 보내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가
종일토록 멈추지 않아 성문을 드나드는 상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문을 닫으려 할 때쯤 한 사람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궁문지기들은 하는 수 없이 그 계란 한 꾸러미를 사서
황희 정승댁에 전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달걀들은 전부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고,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못내 탄식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계란유골(鷄卵有骨)'은 '계란에
뼈가 있다' 또는 '계란이 곯아서 먹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운이 나쁜 사람은 모처럼의 좋은 기회가 와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기서 ‘골(骨)’은 ‘곯다’의 음을 따서 쓴 일종의 음차
(音借) 표기로 볼 수 있다.
많은 고사성어가 고대 중국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Made in China인데 반해, 계란유골은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순수 토종 고사성어이다.
'계란유골'과 비슷한 속담으로는 ‘재수 없는 포수는
곰을 잡아도 웅담이 없다.’, ‘밀가루 장사를 하면 바람이
불고, 소금 장사를 하면 비가 온다.’ 등을 들 수 있다.
'계란유골' 이야기는 조선 순조 때의 학자 조재삼이 쓴
<송남잡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황희가 이 정도로 청렴하거나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야사로 전해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짐작된다.
황희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 개경 근처의 두문동에 들어가 숨어
살았지만, 태조 이성계의 끈질긴 간청으로 뜻을 꺾고
벼슬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황희는 태종 이방원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새로이 세자로
삼으려는 것을 극렬 반대하다가 태종의 분노를 사
유배를 갔다.
세종은 그런 황희를 불러들여 중용할 만큼 인재를
활용함에 있어 개인적 감정에 좌우되지 않았다
황희는 단연 세종대왕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종 시대에 18년 동안이나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황희는 왕권이 강했던 시기에는 임금의 일방적인
독주에 제동을 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세종이 어려운 입장에 처했을 때는 세종의 편에
서는 균형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황희는 술을 좋아해 끊지 못하는 아들에게
"이제부터 자네는 자식이 아니니 손님으로
예우하겠다."며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들을 향해
넙죽 큰 절을 했고, 이에 무안해진 아들은 결국 술을
끊었다는 재미난 일화도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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