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는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2천여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한 시대 역사의 주역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과거에 여러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해 불우한 초년을 보냈다.
그는 벼슬도 없이 허송세월 하다가 3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상들의 음덕으로 관직을 얻는 음서를 통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런데 그에게 주어진 벼슬이라는 것이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머물렀던 개성, 즉 송도의 경덕궁을
지키는 궁지기 자리였다.
송도에서 경덕궁지기 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해 명절
휴일에 개성부 산하 관리들이 송악산 만월대에서
큰 연회를 열었는데, 한명회 역시 고관들과 친분을
쌓을 요량으로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 사람이 제안했다.
“우리는 모두 서울에 살던 벗들로, 멀리 개성에 와서
벼슬을 하고 있으니 송도계(松都係)를 만들어 앞으로도
친목을 도모하며 잘 지내도록 합시다.”
참석자들 모두가 찬성하였고, 한명회 또한 송도계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미관말직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거절 정도가 아니라 "경덕궁지기도 벼슬이냐?"라고
한바탕 놀림까지 당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의 인생은 180도 바뀌기 시작한다.
과거 공부를 하던 시절 친하게 지냈던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세조는 한명회를 "나의 장자방"이라고 말할 정도로
신뢰했다.
장자방의 본명은 장량으로, 고대 중국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책사가 되어 군막 안에서 천리 밖 전장의
계책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 때마다 기묘한
책략으로 유방을 구해 한나라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453년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서
큰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책봉되었고,
수양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뒤에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렇듯 한명회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자 예전에
개성에서 송도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그때 한명회를
무시하고 계원으로 받아 주지 않았던 일을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선조 때의 문신이었던 한음 이덕형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유래한 '송도계원(松都契員)'이란 '송도계의
일원'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지위나 세력을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명회는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내 권신과 외척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는 한강변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곳(지금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뒤편)에 자신의 호를 딴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한명회는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저승에선 편히 쉬지 못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한명회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라는 수난을 겪었다.
의금부에서는 그의 묘가 있는 청주로 가서 묘를 파
관을 가르고 머리를 베어와 한양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또한, 의리와 예도를 숭상하는 사관들은 그가 유능한
책사가 아니라 권모술수에 능한 모리배로 평가절하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하급 직원에 대한 오너 또는 상사의 갑질, 서비스업
종사자에 대한 소비자의 갑질, 협력업체에 대한
원청사의 갑질, 임차인에 대한 건물주의 갑질 등
다양한 유형의 갑질 문제가 이따금 사회적 이슈가
되곤 한다.
당장의 조그만 우월적 지위를 배경 삼아 갑질을 해대는
송도계원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행동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지위가 낮고, 힘이 없고, 돈이 없어 갑질을
당하고 있지만, 훗날 살생부를 들고 나타난 한명회처럼
인생역전하여 나타날 사람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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