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삶의 지혜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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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65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조조의 '자가당착(自家撞着)'

서기 198년, 후한 말 건안 3년 때의 일이다, 동탁의 잔당 장수(張繡)가 한나라의 도읍이었던 허도 남쪽 남양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인 헌제는 승상인 조조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토벌하겠다고 하자 성밖까지 나가서 조조의 군사를 환송했다. 때는 초여름이었다.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보리가 잘 익은 들판을 지나는데,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조조가 곁에 있던 책사 곽가에게 물었다. "어째서 농부들이 보리수확을 하지 않는가?" "예, 농부들은 군사작전이 펼쳐지면 군대의 행패가 무서워 모두 달아나버립니다. 그 해악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그 지역 노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불러 모은 후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나는 황제의 명으로 반..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후한 양진과 왕밀의 '모야무지(暮夜無知)'

AD 2세기경 후한(後漢) 때의 인물인 양진은 학식과 품성이 훌륭한 선비였다. 그가 동래 태수가 되어 부임하는 길에 창읍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창읍에는 오래 전 그가 관직에 추천했던 왕밀이 현령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밤늦게 금 10근을 가지고 찾아와 양진에게 바쳤다. 이에 양진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잘 알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잘 모르니 웬일인가?” 그러자 왕밀이 대답했다. “이것은 뇌물이 아니라 태수님이 지난 날 저를 현령으로 추천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한밤중이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왕밀이 했던 이 말에서 유래한 '모야무지(暮夜無知 저물 모, 밤 야, 없을 무, 알 지)'는 '어두운 밤중에 하는 일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뇌물이나 선물..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주나라 선왕과 기성자의 '목계지덕(木鷄之德)'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기원전 8세기 경, 고대 중국에서는 닭싸움이 성행해 왕부터 서민까지 닭싸움을 즐겼다. 주나라 선왕도 닭싸움을 몹시 좋아해 당대 최고의 싸움닭 조련사인 기성자라는 사람에게 자신의 닭을 맡기면서 최고의 싸움닭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닭을 맡긴지 열흘이 지나고 왕이 기성자에게 물었다.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 기성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 교만을 떨치지 않는 한 최고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 왕이 묻자 가성자가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움직임에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또 다시 열흘이 지나 왕이 묻자 기성자가 대답했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은(상)나라 탕왕의 '오청이윤(五請伊尹)'

좋은 목수가 좋은 연장을 쓰듯 성공을 꿈꾸는 리더는 유능한 부하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 노력한다. 한나라 때의 역사가 사마천이 쓴 에는 오청이윤(五請伊尹) 고사가 나온다. BC 18 세기경 고대 중국 은(상)나라 시조인 탕왕은 초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도를 실천하던 요리사 출신 이윤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신하로 쓰고 싶었다. 탕왕은 네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 이윤의 출사를 청했으나, 이윤은 탕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탕왕은 다섯 번째는 자신이 직접 마차를 몰고 이윤에게로 가서 함께 일할 것을 청하기로 했다. 이처럼 탕왕이 직접 마차를 몰고 간 것은 몇 번씩이나 같은 길을 오가며 탕왕의 심무름을 했던 마부가 불평을 하자 혹시나 그가 이윤 앞에서도 불만스런 표정을 보이지 않을까 염려해 마부를 남겨 놓고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당 태종과 위징의 '이인위경(以人爲鏡)'

위징은 AD 7세기 당 고조 이연의 아들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일 때 황태자인 이건성의 편에 서서 동생 이세민을 죽이라고 간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생인 이세민이 형 이건성을 죽이고 권력투쟁의 승자가 되었고, 2대 황제 태종으로 즉위한 이세민은 정적이었던 위징의 인품과 지략을 높이 평가해 그를 죽이는 대신 발탁하여 중용했다. 君舟民水 水則載舟 水則覆舟 (군주민수 수즉재주 수즉복주)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태종 이세민의 신하가 된 위징은 순자의 위 문장을 인용해가며 간언을 했는데, 그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 이세민은 위징의 간언에 화를 내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200여 차례에 이르는..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논어>와 <삼국지>의 '우도할계(牛刀割鷄)'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유(子遊)는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열 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유는 노나라에서 읍재(邑宰)라는 하급 벼슬에 올라 조그만 읍인 무성을 다스리면서 공자에게 배운 대로 예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자유를 만나러 무성으로 갔다. 그때 마을 곳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 할계언용우도)”라고 말했다. 공자가 이처럼 말한 것은 자유가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무성과 같은 작은 읍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본심을 몰랐던..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비자와 '제궤의혈(堤潰蟻穴)'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비롯되고, 천하의 큰 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은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큰 일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천 길이나 되는 제방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고, 백 척이나 되는 큰 집도 굴뚝 틈새로 새어 나온 작은 불티 하나 때문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시대 법가 사상을 완성한 한비자가 지은 책 에 나오는 내용으로, '천 길이나 되는 제방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는 말에서 유래한 '제궤의혈(堤潰蟻穴 제방 제, 무너질 궤, 개미 의, 구멍 혈)'은 '사소한 실수나 부주의로 큰 일을 망치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비자는 '제궤의혈'의 예로 고대 중국 주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과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항우와 두목의 '권토중래(捲土重來)'

BC 202년, 유방과 천하를 다투던 초패왕 항우가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가 오강에 이르렀다. 오강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 동북쪽, 양자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항우가 오강까지 쫓겨 왔을 때 오강의 정장은 배를 준비해 놓고 항우에게 "강동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구가 살고 있으므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십시오."라고 말하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할 것을 권했다. 강동은 항우가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장의 말에 항우는 "내가 오래 전에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데리고 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의 부형(父兄)을 대할 수 있겠는가?"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제갈량의 '아심여칭(我心如秤)'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제갈량의 말에서 유래한 '아심여칭(我心如秤 나 아, 마음 심, 같을 여, 저울 칭)'은 나의 마음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 공평무사 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을 개입시키지 않고 법대로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제갈량은 뛰어난 지략가이자 정치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한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위, 촉, 오, 삼국 가운데 촉(蜀)의 내부에는 형주 세력, 동주 세력, 익주 세력 등 큰 파벌이 세 개나 존재하면서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더구나 촉의 황제 유비가 이릉 전투에서 오나라 장군 육손에게 대패한 뒤 백제성에서 병사하고, 어린 아들 유선이 그 뒤를 이었지만, 아직 체제가 허약했다.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승상인 제갈량은..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하후돈의 '부정모혈(父精母血)'

하후돈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 휘하의 장군으로, 한나라의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다. 그는 조조가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 진영에 동참했다. 하후돈은 성격이 강직하고, 창술에 뛰어났으며, 조조와 한 집안이었는데, 일부 문헌에는 하후돈이 조조와 사촌지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이 다른 하후돈과 조조가 한 집안 또는 사촌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조조도 본래 성씨가 하후씨였는데, 조조의 아버지가 당시 실세 환관이었던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성이 하후씨에서 조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조조는 늘 하후씨를 일가로 여겨 자신의 주변에 중용했다. 하후돈은 매우 충성스러웠고, 조조와 수레를 함께 타는 참승(驂乘) 역할을 맡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