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02년, 유방과 천하를 다투던 초패왕 항우가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가
오강에 이르렀다.
오강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 동북쪽, 양자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항우가 오강까지 쫓겨 왔을 때 오강의 정장은 배를
준비해 놓고 항우에게 "강동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구가 살고 있으므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십시오."라고
말하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할 것을 권했다.
강동은 항우가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장의 말에 항우는 "내가 오래 전에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데리고 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의 부형(父兄)을 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강을 건너기를 거절했다.
항우는 다만 자기가 타던 말 오추마는 죽일 수 없다며
정장에게 말을 배에 태워 강을 건널 것을 당부하고는
뒤쫓아 온 한나라 군사를 맞아 잠시 용맹을 보인 뒤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진(秦)나라 멸망 후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의 초한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항우가 죽은 지 천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가 최후를 맞은 오강 변 정자에서
'제오강정(題烏江亭)' 시를 지어 항우가 단 한 번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죽은 것에 대한 연민의 정을 담았다.
시를 잘 지어 작은 두보, 즉 소두(小杜)라고 불리기도
했던 두목의 '제오강정' 시는 항우의 최후를 읊은
많은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勝敗兵家事不期 (승패병가사불기)
包羞忍恥是男兒 (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才俊 (강동자제다재준)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미가지)
승패는 병가지상사여서 기약할 수 없는 법,
수치심을 끌어안고 치욕을 참아야 남아인 것을.
강동의 자제들 재주 있는 인재들이 많아,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이 시에서 유래한 '권토중래(捲土重來)'는 '흙먼지를
말아 올리면서 다시 온다'는 뜻으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힘을 길러 다시 승리와 성공을 도모한다는 의미로,
오늘 날까지도 재기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고사성어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에 한번 실패했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과감하게 손절을 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작전상 후퇴가
필요할 때도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말로는 '줄행랑'이라고 속되게 표현되는
도망치는 일 또한 36계의 마지막 계책인 '주위상계
(走爲上計)'로 병법에서는 중요시되고 있다.
도망가야 할 상황에서는 자존심도 버려야 한다.
항우가 오강을 건너 일단 철수했다가 다시 힘을 길러
반격에 나섰다면 항우의 운명과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이나 기업들의 화려한
면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이면에는 숱한 실수와 실패의
어려움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선수 생활을 하며 경기장에서 9천 개 이상의
슛을 실패했고, 약 3백 경기에서 패배했으며,
스물 여섯 번이나 승부를 결정짓는 슛을 실패했다.
나는 계속 실패하고 실패했다.
이것이 내 성공의 이유이다."
어느 외국 스포츠화 광고에서 인용한 세계적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의 말처럼 실패는 성공의 걸림돌이 아니라
성공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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