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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이야기

명화 이야기 / 한스 홀바인의 초상화들

물아일체 2023. 9. 7. 04:00

한스 홀바인(1497 - 1543년)은 독일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의 거장이다.

미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514년 독일을 떠나 

스위스 바젤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러나 바젤이 종교개혁의 여파로 교회의 미술 장식이

금지되면서 화가들의 일자리가 없어지자 홀바인은

영국으로 건너가 전문 초상화가로 변모했고,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일본에는 한스 홀바인의 이름를 딴 '홀바인'이라는

미술용품 회사가 있다고 한다.

 

               < 대사들(The Ambassadors) >

 

 

홀바인이 1533년에 그린 대표적 작품이다.

이 그림은 화려한 의상을 입은 두 인물의

초상화이지만, 그림 안에는 여러 가지를 상징하는

장치들이 그려져 있다.

 

왼쪽에 담비 털옷을 입고 있는 장 드 댕트빌은

영국 주재 프랑스 대사이고, 오른쪽의 사제복을

입은 사람은 댕트빌의 고향 친구인 프랑스의

조르주 드 셀브 주교이다

 

이들의 나이는 29세와 25세로, 댕트빌의 나이는

그가 쥐고 있는 칼자루에 새겨져 있고, 셀브의 나이는

그의 오른팔 아래에 있는 책에 적혀 있다.

 

쉘브 주교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온 이유는 영국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헨리 8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첫 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을 하기 위해 이혼을 반대하는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영국 국교회를 만들어

스스로 그 수장이 되었다.  

 

 

선반 하단에는 지구본과 수학책, 직각자와 콤파스,

그리고 펼쳐진 찬송가와 당시 유행하던 현악기 류트가

놓여 있고, 그 밑에는 플루트가 있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식과 쾌락과 종교를 상징한다.

 

직각자로 갈피 된 수학 책은 나눗셈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분열된 유럽의 상황을 상징한다.

류트는 조화와 화합을 상징하는 악기로, 줄이 끊어져

있다는 것은 로마 교황청의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의

갈등을 의미한다.

플루트 또한 다섯 개의 관 가운데 하나가 비어 있어,

유럽 국가들의 분열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 찬송가에는 카톨릭과 루터교를 대표하는

찬송 구절을 양쪽 페이지에 넣어 두 종교가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할 것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선반 상단에는 별을 상징하는 천구의, 천체관측기구인

사분의, 나침반, 해시계가 놓여 있다.

해시계는 헨리 8세와 왕비 캐서린이 이혼하고 서류에

서명한 (1533년) 4월 11일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소품들은 신대륙 발견과 함께 천문학을 이용한

항해술과 과학이 발달해가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바닥에는 사선 모양의 기이한 해골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처럼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왜곡시켜

그리는 기법을 왜상기법(anamophosis)이라고 한다.

 

 

이 해골이 상징하는 것은 위쪽에 진열된 소품들이

의미하는 과학이든 예술이든 권력이든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것이라는

표현이다.

 

                     < 클레베의 앤 공주 >

 

 

독일 클레베 공국의 앤 공주 초상화인데,

홀바인은 자칫 이 초상화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모두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던 것으로 유명한 

헨리 8세는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가 죽자

네 번째 부인으로 독일 클레베 공국의 앤 공주를

마음에 두고 홀바인을 보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오도록 했다.

당시는 사진이 없던 때라 결혼 전에 초상화를 통해

신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는 일이 흔했다.

 

헨리 8세는 홀바인이 그려 온 그림 속 앤 공주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식을 위해 영국에 온 앤 공주의 실물을 본

헨리 8세는 그림과 너무 다른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홀바인이 초상화를 그리면서 뽀샵을 너무 심하게

했던 탓이다.

 

이 일로 결혼 중매를 섰던 사람은 처형을 당했지만,

초상화를 그린 홀바인은 다행히 궁정 화가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앤 공주와 결혼식을 올린 헨리 8세는

6개월만에 이혼을 했고, 이혼을 당한 공주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서 17년을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앤 공주와 이혼한 헨리 8세는 다섯 번째 부인으로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 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간통혐의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참수형을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 헨리 8세 초상화 >

 

 

헨리 8세의 초상화는 풍채가 좋은 통치자의 당당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헨리 8세는 다리를 쩍 벌리고 주먹을 허리에 짚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헨리 8세는 16세기 영국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한 왕이다.

당시 영국은 유럽의 변방 이류 국가였는데, 헨리 8세는

해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16세기 초부터 함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개량하는 등 국력을 강화했다.

 

헨리 8세가 양성하기 시작한 영국 해군은 반 세기 후,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해양강국으로 발돋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토머스 모어 초상화 >

 

 

영국의 인문주의자이자 정치가였으며, '유토피아'를

쓴 문필가인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이다.

모어는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이 영국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모어는 헨리8세가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