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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이야기

명화 이야기 / 화가의 여인들

물아일체 2021. 10. 10. 21:50

많은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재능을 꽃피게

해준 뮤즈가 있다.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 화가를 사랑한 여인들의

삶이 행복하고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화가의 여인들, 그들은 때로는 화가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뮤즈로서, 또 때로는 화가의 고달픈 삶의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하며 한 세상을 살다 갔다.

그들 중에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아름다운 사랑 또는

안타까운 인연으로 기억되는 여인들이 적지 않다.

 

(1)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엘레네 푸르망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는

풍만한 여체를 통해 강렬한 바로크적 에로티시즘을

생생하게 보여준 화가이다.

 

루벤스가 그린 <모피>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그가

53살의 나이에 재혼한 17살의 아내 엘레나가 목욕을

마치고 나와 모피로 몸을 감싼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성숙한 몸매임에도 홍조 띤 붉은 뺨에 앳된 표정이

엘레나의 나이가 많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엘레나를 몹시 사랑했던 루벤스는 이 그림을 단 한번도

전시회에 출품하거나 팔지 않고 간직하다가, 2년 뒤

죽을 때 엘레나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2) 클로드 모네와 까미유 동시외

모네는 <인상, 해돋이>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의 대표 화가이다.

모네가 1875년에 그린 <양산을 쓴 여인>은 아내인

까미유와 아들 장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창한 날 오후에 한적하게 산책 나온 모네 가족의

행복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25살의 모네와 18살의 까미유는 화가와 모델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가족들로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당시 그림 모델을 하는 여성들 중에는 술집에서 춤을

추는 무희나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매춘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모네의 가족들은 까미유를 천한 여성으로

취급했고, 둘의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모네는 까미유와 함께 살았고, 모네의 집에서는

모든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며 관계를 단절했다.

 

모네와 까미유의 생활은 지독히 궁핍했지만 서로를

사랑했고 행복했다.

그런데 까미유는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32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야외에서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던 모네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빛이 없는 화실에

처박혀 정물화에 집중하게 된다.

 

(3)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델

로댕은 웅대한 청동상과 대리석상으로 유명하며,

가장 뛰어난 초상 조각가로 평가된다.

1889년 제작된 대리석 조각의 <사색>은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클로델의 모습이다.

 

로댕은 조수로 받아들인 카미유와 23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 당시 로댕은 이미 다른 여인과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아들까지 있었다.

로댕과 카미유는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주고 받으며 10여 년 동안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카미유는 로댕이 동거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모델들과 은밀한 만남을

갖는 것에 실망해 결별하게 된다.

그 후 카미유는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여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30여 년을 지내다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알린 샤리고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는 '행복을 그린

화가'라고도 불릴 만큼 사람들의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즐겁고 경쾌하게 묘사했다.

르누아르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 소재는 여성이었다.

그는 특히 통통한 몸매에 둥근 얼굴의 여성상을

좋아했다.

 

<모성(젖을 먹는 아기)>에서는 첫째 아들 피에르에게

젖을 먹이는 알린의 친근하고 정겨운 모습이 담겨 있다.

르누아르는 40대 때 20대의 젊은 모델 알린을 만나

결혼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으로 평생을 보냈다.

르누아르가 행복한 그림을 그린 밑바탕에는 그의

행복한 가정생활이 있었다.

 

(5) 구스타브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클림트가 1902년에 그린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이다.

클림트는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여성의

관능미 표현에 뛰어났던 오스트리아의 대표 화가이다.

클림트는 평생 동안 결혼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클림트가 평생을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여인이 에밀리 플뢰게이다.

에밀리는 빈에서 부티끄를 운영하는 성공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

 

클림트는 생전에 에밀리에게 400여 통의 엽서를 보냈고,

작품 속에서도 에밀리를 다른 여인들처럼 화려하고

육감적이기보다는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표현했다.

클림트는 심장발작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에밀리를 찾았고, 에밀리는 클림트가 죽은 36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클림트의

기억을 안고 살았다.

 

(6)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

모딜리아니는 긴 목과 타원형의 얼굴, 우아하고 애수가

깃든 여인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가

1919년에 그린 아내 잔느의 초상화이다.

 

유대계 이탈리아 화가인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적 성취에 대한 집념과 경제적

불안정 등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술집을

전전하며 삶과 건강을 소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델인 18세의 소녀 잔느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잔느의 부모님은 술과 마약중독에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모딜리아니와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잔느는 모딜리아니와 결혼을 했고, 이후 딸을 

낳았으며,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3년 동안 그의 곁에서

모델이자 삶의 동반자로서 행복한 생활을 했다.

잔느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이틀 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부모님의 집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녀의 나이 22살 때의 일이었다.

 

(7) 마르크 샤갈과 벨라 로젠펠트

풍부한 감성과 상상력을 다채로운 색채로 표현한

색채의 마술사 샤갈은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이다.

22살의 샤갈은 14살의 화가 지망생 소녀 벨라를 보고

첫 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지만, 벨라의 부모님은

두 사람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샤갈과 벨라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6년이 지난 후

두 사람은 결혼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결혼식 열흘 전, 샤갈의 생일에 그린 <생일>이다.

벨라는 생일 축하 꽃다발을 들고 있고, 샤갈은 그녀에

대한 사랑과 행복으로 벨라를 향해 공중에 날아오른

모습이다.

샤갈이 57세 되던 해 벨라는 삶을 먼저 마감했고,

비탄과 충격 속에 한동안 붓을 들지 못했던 샤갈은

벨라와의 추억을 담은 많은 그림을 남겼다.

 

(8)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대표 달리가 1945년에 그린 

<레다 아토미카>이다.

갈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레다의 모델로 순수하고

성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달리는 어느 날 친구의 아내인 갈라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것은 갈라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남편 곁을 떠나

무명의 화가인 달리에게로 왔다.

이때 달리의 나이는 스물 다섯이었고, 갈라는 달리 보다

열 살이 많았다.

갈라는 달리의 연인이자 모델이요, 때로는 매니저의

역할을 하며, 달리를 스페인 초현실주의 미술의 대가로

키웠다. 

갈라가 없었다면 오늘날 알려진 달리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달리와 갈라는 53년간을 해로했다. 

달리는 “나는 갈라를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보다도, 

피카소보다도, 심지어 돈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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