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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이야기

명화 이야기 / 처형, 학살

물아일체 2021. 10. 6. 22:13

전쟁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한다.

전쟁을 더욱 참혹하게 만드는 것은 민간인에 대한

처형과 학살 때문이다.

화가들은 이러한 전쟁의 비참함을 그림으로 남겼고,

그러한 그림들은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강조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적 선전물이 되기도 했다.

 

(1)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2일>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고야는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연작으로 그렸다.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카를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를 강제로 축출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다.

스페인 시민들은 분노했고, 5월 2일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 군에 대항했지만 하루 만에 진압

되었고, 무자비하게 처형당했다.

약 5천 명의 스페인 시민이 학살된 이 사건은

고야에 의해 <1808년 5월 2일>이라는 극적인

사실주의적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2)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

고야의 이 그림은 5월 2일의 봉기에서 체포된

마드리드 시민들을 프랑스 군인들이 봉기 다음 날인

5월 3일에 처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는 무자비한 프랑스군 앞에서

양팔을 들고 무기력하게 항의하며 스러져가는 시민들이  

그려져 있다.

어두운 밤, 힘없이 저항하고 있는 이에게 비치는

가냘픈 한줄기 빛, 두려움에 떨며 기도하는 사람,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뒤로 멀리 보이는

불 꺼진 희미한 예배당은 그들에게 희망이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전쟁의 공포와 야만성에 대해 불만을 토로 하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후대 예술가들,

특히 마네와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3)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 등의

작품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를

이끈 화가이다.

마네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그렸다.

 

1864년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을

황제로 내세워 그 곳에 괴뢰 정부를 수립한다.

막시밀리안 본인의 욕심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이 집권한지 채 3년도 안되어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모두 철수시키자 멕시코 독립군에 맞설 군사력이

없었던 막시밀리안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결국 막시밀리안은 휘하의 장군들과 함께 멕시코

독립 게릴라들에 의해 체포되어 1867년 6월

처형을 당했다.

황제는 총살을 당하기 전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길

병사들에게 금화를 나눠주면서 정확하게 쏘되,

얼굴은 겨냥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 때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마네는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의

무모한 대외 확장정책에 있음을 폭로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막시밀리안이 쓰고 있는 모자를 마치 중세 성인의

후광처럼 보이도록 했으며, 돌아서서 총알을 장전하는

프랑스 중사의 얼굴을 나폴레옹 3세의 모습으로 그렸다.  

고야는 형 집행자들이 총을 겨누는 장면을 묘사했지만,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좀 더 사실적인

처형 장면을 표현했다.

 

(4)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마찬가지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처형> 역시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왔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는 프랑스 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진보 진영에선 전쟁의 비참함과 반전 메시지를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지만, 보수 진영에선 북한의 일방적

주장을 반영한 선전 선동화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피카소는 공산당원이었고, 이 그림은

70여 년간 한국 반입이 금지되었다가 지난 2020년

처음으로 국내 전시가 이뤄졌다.

 

(5)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스페인이 내전을 벌이고 있던 1937년 4월 26일,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던 독일은

전투기들을 동원해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1,5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했는데,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려 이 사건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흑색, 백색, 회색의 입체적 형상 속에 전쟁의 비참함이

잘 나타나 있는 이 그림은 가로 7m, 세로 4m의

대형 작품으로,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여인, 창에

찔린 말, 부러진 칼 등을 통해 인간을 파괴하는 무모한

폭력을 비난하고 있다.  

 

피카소는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고국인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1973년 사망하면서 프랑코의 독재가 끝난 뒤에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1981년 그림은 마침내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6) 외젠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 화가 들라크루아가 1822년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이 투르크인들에게 대량으로

학살당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이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키오스 섬의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위해 혁명을 도모했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민 2만 5000명이 죽고,

5만여 명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 그림에는 정복자들의 오만한 자부심과 죄 없는

그리스인들의 절망과 공포가 잘 드러나 있다.

하늘을 덮은 짙은 구름과 피폐해진 들판이 비극적

분위기를 더욱 실감 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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