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삶의 지혜와 즐거움!
고전은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13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후한 양진과 왕밀의 '모야무지(暮夜無知)'

AD 2세기경 후한(後漢) 때의 인물인 양진은 학식과 품성이 훌륭한 선비였다. 그가 동래 태수가 되어 부임하는 길에 창읍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창읍에는 오래 전 그가 관직에 추천했던 왕밀이 현령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밤늦게 금 10근을 가지고 찾아와 양진에게 바쳤다. 이에 양진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잘 알고 있는데, 그대는 나를 잘 모르니 웬일인가?” 그러자 왕밀이 대답했다. “이것은 뇌물이 아니라 태수님이 지난 날 저를 현령으로 추천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한밤중이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왕밀이 했던 이 말에서 유래한 '모야무지(暮夜無知 저물 모, 밤 야, 없을 무, 알 지)'는 '어두운 밤중에 하는 일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뇌물이나 선물..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당 태종과 위징의 '이인위경(以人爲鏡)'

위징은 AD 7세기 당 고조 이연의 아들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일 때 황태자인 이건성의 편에 서서 동생 이세민을 죽이라고 간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동생인 이세민이 형 이건성을 죽이고 권력투쟁의 승자가 되었고, 2대 황제 태종으로 즉위한 이세민은 정적이었던 위징의 인품과 지략을 높이 평가해 그를 죽이는 대신 발탁하여 중용했다. 君舟民水 水則載舟 水則覆舟 (군주민수 수즉재주 수즉복주)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태종 이세민의 신하가 된 위징은 순자의 위 문장을 인용해가며 간언을 했는데, 그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 이세민은 위징의 간언에 화를 내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200여 차례에 이르는..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논어>와 <삼국지>의 '우도할계(牛刀割鷄)'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자유(子遊)는 중국 춘추시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열 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유는 노나라에서 읍재(邑宰)라는 하급 벼슬에 올라 조그만 읍인 무성을 다스리면서 공자에게 배운 대로 예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자유를 만나러 무성으로 갔다. 그때 마을 곳곳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공자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 할계언용우도)”라고 말했다. 공자가 이처럼 말한 것은 자유가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무성과 같은 작은 읍에서 일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본심을 몰랐던..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항우와 두목의 '권토중래(捲土重來)'

BC 202년, 유방과 천하를 다투던 초패왕 항우가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다가 오강에 이르렀다. 오강은 지금의 안휘성 화현 동북쪽, 양자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항우가 오강까지 쫓겨 왔을 때 오강의 정장은 배를 준비해 놓고 항우에게 "강동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만 인구가 살고 있으므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십시오."라고 말하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할 것을 권했다. 강동은 항우가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장의 말에 항우는 "내가 오래 전에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데리고 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의 부형(父兄)을 대할 수 있겠는가?"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하후돈의 '부정모혈(父精母血)'

하후돈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 휘하의 장군으로, 한나라의 개국공신 하후영의 후손이다. 그는 조조가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 진영에 동참했다. 하후돈은 성격이 강직하고, 창술에 뛰어났으며, 조조와 한 집안이었는데, 일부 문헌에는 하후돈이 조조와 사촌지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이 다른 하후돈과 조조가 한 집안 또는 사촌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조조도 본래 성씨가 하후씨였는데, 조조의 아버지가 당시 실세 환관이었던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성이 하후씨에서 조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조조는 늘 하후씨를 일가로 여겨 자신의 주변에 중용했다. 하후돈은 매우 충성스러웠고, 조조와 수레를 함께 타는 참승(驂乘) 역할을 맡을 정도로..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공자와 안회의 '단사표음(簞食瓢飮)'

공자가 말하였다. “어질도다, 안회여. 대그릇의 밥 한 그릇을 먹고 표주박의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 누추한 곳에 살면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일단사 일표음 재누항)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어 내지 못하거늘, 안회는 즐거움을 잃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안회여.”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유래한 '단사표음(簞食瓢飮)'은 '대그릇의 밥 한 그릇과 표주박의 물 한 모금'이라는 뜻으로, 아주 소박하고 청빈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이다. 안회는 평생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지만,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그런 안회를 보고 공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노숙과 여몽의 '괄목상대(刮目相對)'

여몽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오(吳)왕 손권 휘하의 장수이다. 그는 주유와 노숙의 뒤를 이어 오나라 대도독이 되었으며, 관우가 지키던 형주를 빼앗은 장수로 유명하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부터 오로지 무술에만 힘을 쏟았을 뿐, 글공부는 한 적이 없어 주변으로부터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런 여몽이 주군인 손권으로부터 공부 좀 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장에 나가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그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어느 날 대도독이 된 노숙이 여몽의 군영을 지나게 되었다. 노숙은 마음속으로 여몽을 여전히 경시하고 있었는데, 측근 한 사람이 노숙에게 말했다. “여몽 장군의 공명이 나날이 빛나고 있으니 이제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한번 가서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나라 유세군과 '오손공주(烏孫公主)'

오손공주(烏孫公主)는 '오손으로 시집을 간 공주'라는 뜻으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된 슬픈 운명의 여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략결혼은 특별한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추진되는 결혼을 일컫는 것으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왕실 또는 유력 가문이 결혼을 통해 제휴를 한 경우는 많다. 유명한 정략결혼으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루이 16세의 결혼을 들 수 있다. 유럽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두 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는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고대 중국에서는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정략결혼이 자..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세종과 황희의 '계란유골(鷄卵有骨)'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는 청렴한 생활을 하다 보니 관복도 한 벌밖에 없었으며,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 이런 황희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던 세종은 어느 날 새벽에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저녁에 성문을 닫을 때까지 하루 동안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물건을 모두 사서 황희에게 보내주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가 종일토록 멈추지 않아 성문을 드나드는 상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문을 닫으려 할 때쯤 한 사람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궁문지기들은 하는 수 없이 그 계란 한 꾸러미를 사서 황희 정승댁에 전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달걀들은 전부 곯아서 먹을 수가 없었고,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못내 탄식해 마지..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항우와 한생의 '목후이관(沐猴而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시황제가 죽은 뒤, 진승 오광의 난을 계기로 진나라의 포악한 정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도처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항우는 숙부 항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세우고 회왕을 옹립했는데, 회왕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항우가 거록에서 진나라 군대와 맞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을 향해 나아갔고, 항우에 앞서 함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유방은 궁 안에 있는 엄청난 재물과 미녀들에 대한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지만, 번쾌와 장량의 조언을 받아들여 궁궐을 온전히 보존한 채 함양에서 군대를 철수해 인근 패상에 주둔했다. 한편, 거록에서 진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른 항우는 서둘러 관중으로 향했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