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감탄과 경외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의 머리 위에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 - 1804년)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이다.
칸트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은
그의 3대 비판 철학서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헤겔 등과
더불어 서양 철학사의 빅(Big) 5로 꼽히기도 하는 칸트는
도덕 철학을 높이 세운 위대한 철학자이다.
칸트가 도덕법칙을 강조한 데에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칸트 아버지의 성격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 하나가
전해온다.
어느 날 칸트의 아버지가 말을 타고 인적이 드문
산길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강도들이 나타나 그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은 뒤 물었다.
“숨긴 것이 더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됐다. 이제 가거라.”
물건을 모두 빼앗은 강도들은 칸트의 아버지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길을 가던 칸트의 아버지는 바지춤에 숨겨둔
금 덩어리 하나가 남아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강도들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말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숨긴 게 없다고 말했는데,
지금 보니 이 금덩이가 남아 있었습니다. 받으십시오.”
칸트 아버지의 이 말에 강도들은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강도들은 빼앗은 물건을 모두 돌려주고는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칸트는 시계처럼 정확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회색 코트를 입고 등나무 지팡이를 들고 집을 나와
산책을 시작하면 이웃 주민들은 정확히 오후 3시 30분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칸트가 이렇듯 산책에 집착했던 까닭은 허약한 몸과
만성 편두통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지만,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랬던 칸트도 임종이 가까워지자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칸트를 위해 하인은 설탕물에
포도주를 타서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칸트는 더는 그것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칸트는 팔십 평생을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쾨니히스베르크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고, 도시 이름도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다.
<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
칸트와 같은 시기에 쾨니히스베르크에 살던 주민들은
한동안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라는 문제를 풀기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이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7개의 다리를 한 번씩만
건너서 처음에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경로를 찾는 문제인데, 매일 이들 다리를 건너 산책을
하는 칸트가 7개의 다리를 각각 한 번씩만 건넌 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주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수학자까지 동원했지만,
아쉽게도 7개의 다리를 모두 한 번씩만 건넌 후 다시
원래의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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