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찾는 삶의 지혜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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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25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삼국지 조조와 '망매해갈(望梅解渴)'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조가 헌제를 왕으로 옹립하고 허도에 도읍을 정한 후 남쪽 원정에 나섰다. 남쪽에서 원술과 손책 같은 군웅들이 끊임없이 허도를 노리고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는 매우 더운 초여름이었다. 병사들은 오랜 행군에 지친데다 식수 부족으로 모두 심하게 갈증을 느껴 행군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조조가 소리쳤다. "저 너머에 커다란 매실나무 숲이 있다. 새콤한 열매가 잔뜩 열려 있을 테니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장병들은 이 소리를 듣고 매실을 생각하자 입안에 절로 침이 고여 다시 기운을 내서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망매해갈(望梅解渴)'은 조조의 뛰어난 재치와 임기응변술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속인 예로써 지적되기도 한다. '망매해갈..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낭중지추(囊中之錐)를 기다릴 것인가, 모수자천(毛遂自薦) 할 것인가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남의 눈에 띄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에 반해 '모수자천(毛遂自薦)'은 모수가 자기 자신을 천거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자신을 추천하거나 자진해서 나서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 쓴 '사기 평원군열전'에는 '낭중지추'와 '모수자천'이라는 상반되는 의미의 고사성어가 동시에 연유하게 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전쟁이 일상화 되고 나라의 생존이 불확실했던 전국시대 말기에는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고, 일부 왕족들은 수천 명의 인재를 자신의 집에서 식객으로 거느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은 전국 사군자 또..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고사성어로 본 한비자의 사상

기존의 질서는 무너지고 전쟁이 일상화 되었던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개인이든 국가든 생존 자체가 불확실한 난세였다. 기원전 3 세기 한(韓)나라 왕실의 서자로 태어난 한비자는'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데, 그의 사상의 핵심은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법치주의이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한비자는 이상주의자인 유가와 대척점에 섰던 인물로, 법가 사상을 완성했다. 그러나 한비자가 강조한 법치는 오늘날의 법치와는 달리 군주가 신하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따라서 군주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법은 가혹하고 두려운 족쇄였다. 한비자의 사상에 큰 감명을 받은 진시황은 법치를 통치의 기본원리로 삼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이뤘지만, 혹독한 법 집행과 형벌로 몰락을 자초하니 이는 법..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꾀 많은 괴짜 식객 풍환과 교토삼굴(狡兎三窟)

전쟁이 일상화 되고 나라의 생존이 불확실했던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는 인재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일부 왕족들은 수천 명의 인재를 자신의 집에서 식객으로 거느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으로, 이들은 전국 사군자 또는 사공자라고 불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은 기원전 3세기 제나라의 왕족으로, 이름은 전문(田文)이다. 풍환은 맹상군에게 의탁했던 수많은 식객 가운데 한 명으로, 맹상군이 식객을 잘 대우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왔다. 맹상군은 그가 별 재주는 없어 보였지만 식객으로 받아주었다. 풍환은 좀 별난 식객이었다. 맹상군은 처음에 그를 3등 숙소에 배치했는데, 풍환은 고기반찬이 없다고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너무 총명해서 화를 당한 양수와 계륵(鷄肋)

'계륵(鷄肋)'은 '닭의 갈비'라는 의미인데,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부위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취하자니 별 이득은 없고, 그렇다고 포기하자니 비록 작은 이득이지만 아까워 망설이게 되는 경우,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을 비유하는 말이다. '계륵'이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하게 한 사람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왕 조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계륵'을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게 만든 이는 조조의 책사인 양수라고 하겠다. '후한서 양수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한 말 위, 촉, 오 삼국의 형세가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 위왕 조조는 촉의 유비와 한중이라는 지역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던 전투는 어느 순간 조조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밀고 들어가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