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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송나라 양공의 '송양지인(宋襄之仁)'

물아일체 2023. 2. 2. 05:00

기원전 7세기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에

양공(襄公)이라는 군주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느 날 송나라 땅에 운석이 비처럼 쏟아지자

자신이 패자가 될 좋은 징조라며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송양공은 당시의 패자였던 제환공이 죽어 혼란에 빠진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를 왕으로 옹립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일로 양공은 점점 교만해졌고, 패권에 대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재상인 목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정나라를 쳐들어갔다.

그러자 초나라는 동맹국인 정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군사를 파견하였다.

 

 

송양공은 초나라 군대를 홍수라고 하는 큰 강가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송나라 군대가 먼저 홍수에 도착했고, 초나라 군대는

조금 늦게 도착해 이제 막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재상 목이가 송양공에게 말했다.

"폐하, 초나라의 군대는 우리보다 훨씬 강합니다.

적이 강을 다 건너기 전에 공격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송양공이 아무 말이 없자 목이가 한 번 더 명령을

재촉했다.

"적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격을 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양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너무 비겁한 짓이오.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은 사내 대장부가 할 짓이 못되오."

 

그러는 사이에 초나라 군대는 어느새 강을 건너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목이가 다시 한 번 다급하게 송양공에게

아뢰었다.

"폐하, 적들은 아직 싸울 준비가 덜 된 상태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공격을 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양공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군자는 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괴롭히지

않는 법, 아직 공격해서는 안 되오.

싸움은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것이오."

 

얼마 후, 초나라의 군대가 싸울 준비를 마치자

송양공은 비로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결과는 뻔했다.

송나라의 군대는 초나라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송양공 자신도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었고, 그로 인해

다음 해에 그만 숨을 거두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송나라 양공의 이러한

행동을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송양지인'은 직역하면 '송나라 양공의 어진 마음'이라는

뜻이지만, '제 분수도 모르고 쓸데없이 인정을 베풀거나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다.

 

'송양지인'은 약육강식의 냉혹한 현실에서 리더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으로, 실력 없는 명분은

패가망신 뿐이라는 교훈을 주는 고사성어이다.

 

그런데 송양공의 초나라와의 전쟁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인의(仁義)가 무너지는 작금의 현실에서 송양공의

인()은 칭송 받을 만하다."고 했고, 성리학의 대가

주자도 송양공의 인을 높이 사면서 춘추오패의 범주에

송양공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의 체면과 명예, 명분만을

생각하다가 가족이나 조직에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또는 물질적 피해를 입히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된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는 관우가 적벽대전에서

대군을 잃고 퇴각하는 조조를 화용도에서 붙잡았지만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는 극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이 또한 관우의 '송양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송양지인' 고사는 우리에게 치열한 외교무대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