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루이 다비드는 1800년대 프랑스 최고의 화가로,
신고전주의 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다비드 만큼 민중 계몽과 정치권력을 위해 미술을
잘 활용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성공과 출세 지향적이고, 시류와 대세에 따라
움직인 전형적인 정치화가였다.
로마 유학 후 왕립 미술 아카데미 회원이 된 다비드는
루이 16세의 궁정화가로 애국심을 고취하고 충성심을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의 대표 작품이 개인이나 가족 보다 국가와 군주를
먼저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이다.
루이 16세의 왕권 강화를 위한 그림을 그리던
다비드에게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그러나 다비드는 곧바로 혁명의 편으로 배를 갈아탔고
자코뱅당 당원이 되었다.
극우 정치화가에서 극좌 정치화가로 빠르게 변신한
것이다.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된 시기에 자코뱅당의 리더
마라가 암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그렸고, 이 그림은 ‘혁명의 피에타’
라고 불리며 프랑스혁명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독재로 자코뱅당 공포정치의 주역인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 다비드도 투옥되었다.
다비드의 정치적 생명도 끝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석방된 후 보수와 진보, 왕정파와 공화파의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사비니의 여인들>을
발표하며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다.
정치적으로 복권하는 데 성공한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로 활동하면서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같은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 영웅 만들기의 선봉에 섰다.
혁명의 화가에서 황제의 화가로 또다시 변신한 것이다.
그러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벨기에로 망명해
죽는 날까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예술가가 정치에 깊이 관여함으로써 결국 조국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1)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5년 제작)
전쟁을 앞둔 아들 셋과 그들을 보내는 아버지의
결의에 찬 모습은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슬픔에 빠진 여인들과 대조를 이룬다.
루이 16세의 요청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애국적
희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상징이 되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고대 로마 건국사에
나오는 일화를 그린 것이다.
초기 로마는 영토 확장을 위해 인접한 알바 왕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대규모 전쟁의 부담이 컸던 양국은 전면전 대신
각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전사를 뽑아 결투를 벌이고
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로마측에서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이 선발되어
결투에 임했고, 승리를 거두었다.
(2) 마라의 죽음 (1793년 제작)
욕실에서 집무를 보던 자코뱅당의 혁명 리더 마라가
지롱드당의 열렬 지지자인 샬롯 코르데에 의해
살해당한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숨이 끊어진 마라의 몸은 욕조에 기대어 늘어졌고,
바닥으로 떨어진 손에는 아직도 펜이 쥐어져 있다.
왼손에 들린 편지는 마라를 죽인 코르데가 면담을
요청하며 쓴 소개장이다.
마라는 갑자기 칼에 가슴을 찔렸기에 당연히 공포와
고통 속에서 죽었을 텐데, 그림 속 마라의 얼굴은
마치 잠을 자는 듯한 평온한 모습이다.
마라를 혁명의 상징이자 순교자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3) 사비니의 여인들 (1799년 제작)
초기 로마와 사비니 부족간의 싸움을 여인들이
중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중앙에 서서 창과 칼로 서로를 겨누는 두 남자를
막아서고 있는 여인과 주변에서 아이를 방패 삼아
양쪽 남자들의 싸움을 말리고 있는 여인들은 모두
사비니 출신 여인들이다.
여자들이 부족해 인구를 늘리기 어려웠던 초기 로마는
이웃나라 사비니 부족의 여인들을 무력으로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그로부터 삼 년 뒤, 사비니 남자들은 자신들의 아내와
딸들을 빼앗겼던 치욕을 되갚기 위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삼 년 전에 끌려갔던 사비니 여인들이 양측의
싸움을 필사적으로 막고 나섰다.
그녀들은 이미 로마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로마와 사비니 부족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했다.
다비드는 혁명세력에 가담했던 지난 날의 과오를
용서받으려는 의도에서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이 작품을 그렸다.
(4)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년 제작)
나폴레옹이 1800년 알프스의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모습을 영웅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흐리고 사나운 날씨 속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말 위에
늠름하게 앉은 나폴레옹이 손가락으로 알프스 너머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험준한 알프스를 말을 타고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날씨가 맑은 날,
백마가 아닌 노새를 타고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알프스를 넘었다고 한다.
(5)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1808년 제작)
가로 9m, 세로 6m가 넘는 크기와 200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관람객을 압도하는 대작이다.
다비드는 참석하지도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를 중앙에
배치하고, 나폴레옹의 키를 훨씬 크게 그렸다.
또한, 죠세핀은 나폴레옹과 결혼 전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둔 40대의 유부녀였으나, 다비드는
그녀를 20대의 아리따운 여인으로 그렸다.
이날 나폴레옹은 교황으로부터 월계관을 받아 자기가
스스로 썼으며, 다비드는 대관식 장면을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다비드는 이렇듯 실제와 다른 이미지를 통해 나폴레옹을
모두에게 사랑 받는 황제이자, 교황에게서도 정당성을
인정받은 신성한 황제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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