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국에는 자신이 닮고 싶은 롤 모델(Role model)
1위의 인물로 범려를 꼽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범려는 춘추시대 월왕 구천의 책사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구천이 패업을 이루도록 보좌한 뒤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구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관직에서 물러났다.
월나라를 떠난 범려는 농업과 상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한 거부가 되어 오늘날까지
재물의 신(財神)이며, 장사의 신(商神)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게다가 일설에는 범려가 월나라를 떠날 때 미녀
서시까지 데려가 함께 천수를 누렸다고 하니
젊은이들이 범려와 같은 삶을 동경하는 것도
수긍이 간다.
범려의 일생을 살펴 보면 권력과 부(富),
경제에 대한 그의 식견이나 생각이 얼마나
명석하고 시대를 앞서 갔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범려는 초나라에서 흙수저로 태어났으나
신분 서열이 엄격한 초나라에서는 출세가 힘들어
월나라로 가서 문종의 추천으로 월왕 구천을 모시는
참모가 되었다.
춘추시대 마지막 패권 다툼인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드라마틱한 복수극의 전개 과정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에 담겨 있는데,
두 나라의 50년 가까운 혈전은 결국 월왕 구천이
승리하고 오왕 부차는 자결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범려는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명으로
동시효빈(東施效矉), 서시봉심(西施捧心) 같은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보내는
미인계로 부차가 정치를 태만히 하게 유도했다.
못생긴 여자가 아름다운 서시의 외모나 행동을
따라 해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동시효빈이나
서시봉심은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빗댄 말이다.
범려는 또한 월왕 구천으로 하여금 병이 난 오왕
부차의 똥을 맛 보고 그의 병이 곧 완쾌될 것이라
아부를 함으로써 환심을 사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월나라가 승리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범려였다.
오나라를 평정한 월왕 구천은 패주가 되었으며,
범려를 상장군에 임명하려 했으나 범려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채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동료인 문종에게 구천은 고생은 함께 해도
즐거움은 함께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며
같이 떠날 것을 제안했다.
狡兎死走狗烹 (교토사 주구팽)
高鳥盡良弓藏 (고조진 양궁장)
敵國破謀臣亡 (적국파 모신망)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고
새를 잡은 뒤에는 활을 곳간에 처박으며
적국이 멸망하면 지혜로운 신하를 제거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필요할 때는 요긴하게 쓰
다가 효용성이 없어지면 야박하게 내팽개치는 경우를
일컫는 것으로, 범려의 말에서 처음 유래했다.
범려는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보다 훨씬 먼저 토사구팽의
이치를 터득한 정치고수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문종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구천으로부터
반역죄를 의심 받아 자결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 도착한 범려는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재산이 계속 불어나자
사람들은 범려를 제나라 재상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범려는 주위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산동성의 도(陶)지역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범려는 상업, 농업, 목축업 등을 하면서
비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또다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사람들은 그를 도주공이라 불렀다.
범려는 부의 축적에만 몰두하지 않고 가난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고 보살펴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자로 칭송 받기도 했다.
범려는 "관직에서 잘 나갈 때는 행동을 자제하여
쇠퇴를 막고, 반대로 몰락의 시기에도 낙담하지 않고
기회를 창출하여 회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생각을 상업에도 적용해
가격이 낮을 때 구매한 후 가격이 오를 때 팔아
막대한 부를 일궜다.
범려는 18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주장한 것에 버금가는 경제에 대한 식견을
이천 오백 여 년 전 춘추시대에 이미 갖고 있었다.
"남는지 모자라는지 잘 따지면 오를지 내릴지를
알 수 있다. 비싼 것이 극에 달하면 싸지고,
값이 내려가면 비싸진다.
값이 오르면 오물을 버리듯 내다 팔고,
값이 내리면 주옥을 얻은 듯 사들인다.
재물과 화폐는 물 흐르듯 돌게 해야 한다."
범려의 이러한 인식은 미국의 억만장자 워렌 버핏이
"다른 투자자들이 탐욕으로 덤벼들 때는 두려워 해야
하고, 그들이 두려워 할 때는 탐욕을 가져야 한다."며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는 투자패턴을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범려는 "천금지자 불사어시(千金之子不死於市),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죽을 죄를 지었어도
저잣거리에서 처형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날 회자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원조 격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범려는 돈의 위력과 속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음은 물론 돈에 대한 인간의 심리까지도
꿰뚫고 있었다.
"무릇 사람은 자기 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지만,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 집 노예가 된다."
완벽한 인생인 것 같은 범려에게도 비극은 있었다.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살인죄를 저질러 사형이
확정되었다.
범려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셋째 아들을 초나라로
보내려 했으나 장남이 자기가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장남에게 돈을 주며 친구인 초나라의
장생을 찾아가라 했다.
그리고 장생의 말을 꼭 따를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첫째는 장생을 만나 준비해 간 돈을 전달했지만
즉시 초나라를 떠나라는 장생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곳에 머물며 동생의 구명 활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장생은 왕을 만나 대사면을 건의해 승인을 받았다.
대사면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첫째는
장생에게 돈을 주지 않았어도 동생이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장생에게 준 돈이 아까워 다시 장생을
찾아갔다.
장생은 화를 내며 그 돈을 가져가라 하고는
다시 한번 왕을 만나 먼저 사형을 집행한 후
대사면령을 내리도록 하는 바람에 범려의
둘째 아들은 졸지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아들의 시신이 집으로 오고 가족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 범려는 자신이 초나라에 막내를
보내려 했던 이유를 담담하게 설명했는데,
돈은 아낄 때와 쓸 때를 아는 것이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막내는 내가 부를 이룬 뒤에 태어났고
유복하게 자라서 돈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래서 막내가 심부름을 갔더라면
내가 시키는 대로 장생에게 돈을 주고는
바로 떠나 왔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는 내가 어려웠던 시절에 태어나
고생을 많이 했기에 돈의 소중함을 알고
아까워 했다. 그래서 다시 장생을 찾아갔고
일이 잘못된 것이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다"
역사가 범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공을 이룬 뒤
그 곳에 머물지 않고 물러나 토사구팽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돈을 크게 벌었지만
부에 집착하거나 쌓아두고 혼자 호의호식
(好衣好食) 하지 않고 널리 베풀었던 처세
때문이다.
범려는 젊은 시절 "충성으로 나라 위하고,
지혜로 몸을 지키며, 장사로 부자가 되어
천하의 명성을 얻겠다"고 했는데, 권력과 돈,
명성, 그리고 사랑과 천수까지 모든 것을 누린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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