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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단상

잘된 논공행상, 잘못된 논공행상

물아일체 2018. 8. 27. 10:32

전쟁이 끝나거나 새로운 왕조 또는 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논공행상

(論功行賞)뒤따른다. 기업 같은 크고 작은 조직에서도 어떤 프로젝트가 끝나면

포상 등의 형태로 나름의 논공행상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룬 성과와 수행한 역할에 대해 조직 또는

윗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따라서 논공행상을 공정하게 잘 하면 조직은 새로운 동력을 얻어 2의 도약을 이룰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조직 내에 불만이 쌓이게 되고 분열과 반목을 일으킨다.

창업 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강태공의 도움으로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은 강태공을 제나라 후()에 봉하는 등

많은 공신과 왕족을 제후(諸侯)에 봉함으로써 봉건제도를 확립했다.

 

춘추시대 () 문공은 19년에 걸친 외국 유랑생활 끝에 62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환공에 이어 번째 패주가 인물이다.

문공은 자신과 함께 고생을 신하들에게 인덕, 지혜, 공로 등의 기준을 적용한 논공행상을

실시해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유랑생활 기간 굶주린 문공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바치는 할고봉군

(割股奉君) 일화를 남긴 개자추를 공신 명단에서 빠뜨리는 실수를 했다.

백성들 사이에 이를 비난하는 노래가 유행하자 개자추는 왕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늙은 어머니와 함께 면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문공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개자추를 찾았으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면산에 불을 질러

그가 나오도록 했지만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죽었다.

문공은 불을 것을 후회하고 개자추가 죽은 날에는 불을 피우지 말라는 명을 내리니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한식의 기원이다.

 

왕이나 대통령 같은 최고권력자를 만든 사람들 소위 메이커의 보상 기대심리는

종종 비리로 이어져 자신은 물론 주군 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개자추의 죽음은 그들에게 주는 교훈이라 있을 것이다.

 

개자추의 일화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반정이 성공한 뒤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위기로 몰아갔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서초패왕이 된 항우는 자신을 도왔던 장수들을 각 지역의

제후왕으로 봉하는 논공행상을 했지만 원칙이 없고 자의적이어서 불만을 품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서쪽 오지인 파촉의 한왕으로 봉해져 '좌천(左遷)' 소리를 들었던 유방의 불만이

가장 컸는데, 유방이 다른 왕들과 함께 항우 타도에 나서게 되니 초한전쟁이 본격화되었다.

 

고조 유방은 해하전투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논공행상을 하면서

군수품 조달과 행정을 맡았던 소하의 공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그러자 장수들이 나서 "우리는 갑옷입고 전쟁터에 나가 수없이 싸웠다.

하지만 소하는 번도 전쟁터에 직접 나가 싸운 적이 없는데, 어찌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는가?" 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유방은 발종지시(發踪指示) 예를 들어 장수들을 질타했다.

"사냥을 토끼를 쫓아가서 잡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개를 부리는 것은 사냥꾼이다.

그대들의 공은 짐승을 잡는 사냥개와 같으나, 소하는 사냥개를 부리는 사냥꾼과 같다."


발종지시는 사냥개를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가리켜 잡게 한다는 뜻으로,

이렇게 하라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유방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가 단행한 공신책록은 가히 최악의 논공행상이라고 있다. 

7년에 걸친 전쟁에서 적과 싸워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불과 18명인데 비해 전쟁이 나자마자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은 무려 86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패했음에도 전사했다는 이유로 이순신과 같은 일등공신으로

책록된 반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곽재우 고경명 의병장들은 공신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더욱이 우리를 어이없게 하는 것은 의병장을 포함한 조선 장수들의 군공을 과소평가하고

호성공신을 크게 늘린 것에 대한 선조의 변명이다.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대의 덕분이다. 조선의 장수들은 그저 중국 군대 뒤를

졸졸 따라 다니거나, 요행히 왜군 패잔병의 머리만 얻었을 뿐이다.

 

“명나라가 지원군을 보낸 이유는 과인을 호종한 신하들 덕분이다.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한 덕분에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것이다.

 

전쟁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한 나라의 임금이 차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선조의 이 같은 공신책록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콤플렉스와 전쟁 영웅들에 대한 백성들의

추앙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논공행상을 완벽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권이 들어서면 정권 탄생에 공을 세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 넘쳐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주장하는 탐천지공(貪天之功) 나타난다.

 

무엇보다 개자추처럼 힘은 보태되 자리를 탐하지 않는 양식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좋겠지만

역사에나 나오는 그런 인물을 현실에서 기대하기는 어렵다.

논공행상에 있어서 누구나 수긍할 있는 명확한 기준과 원칙 그리고 능력을 고려한 탕평의

인재등용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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