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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이야기

명화 이야기 /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의 삶과 그림들

물아일체 2024. 1. 15. 00:00

에곤 실레(1890 - 1918년)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20세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실레는 초기에는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런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심과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게 묘사했다.

 

실레의 성()과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다.

여인과 소녀들을 모델로 한 누드화는 전통적 가치관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도전적이고 노골적 표현으로

정서적 충돌을 일으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죽은 뒤 실레는 오스트리아

미술계를 이끄는 지위에 올라서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실레의 임신한 아내가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실레 역시 3일 뒤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 줄무늬 셔츠를 입은 자화상(1910년) >

 

  

줄무늬 셔츠를 입은 실레의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하다.

그림 속 에곤 실레는 불안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으로

관람자를 응시하고 있다.

 

실레는 많은 자화상을 그려 자아의 내면을 탐구하였다.

그의 자화상은 자아의 일부를 고백하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년) >

 

  

세기말 현상과 전쟁에 따른 불안한 시대의 감성을

포착한 실레의 대표적 자화상이다.

특유의 뒤틀린 인물 형태와 꽈리의 선명한 붉은색이

어우러져 강렬한 불안과 공포감을 연출하고 있다. 

 

             < 고개 숙인 자화상(1912년) >

 

  

실레의 고뇌와 고독이 느껴지는 자화상이다.

일그러진 얼굴, 뒤틀린 신체, 핏기 어린 살갗을

칼질하듯 날카롭게 내리찍은 붓 자국은 자기 혐오와

공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죽음과 여인(1916년) > 

  

에곤 실레는 클림트가 소개해 준 모델 발부르가

노이질과 사랑에 빠졌고, 노이질은 실레의 뮤즈가

되었다. 하지만 실레는 신분이 낮고 가난한 노이질과의

결혼을 망설였다.

 

그녀 대신 에디트 하름스라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오랫동안 함께 해온 노이질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 

<죽음과 여인>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림 속 남자는 실레 자신이며 여인은 노이질로

해석된다.

남자의 눈은 공허하고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며

여자에게 파묻혀있다.

여인의 표정 또한 포옹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하는 듯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의 몸을 감고 있는 여인의 팔은 한줄기 끈처럼

가늘다. 그러면서도 깍지를 끼고 있는 것은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염원 때문이라고 하겠다.

 

                          < 포옹(1917년) >

 

 

<포옹>은 <죽음과 여인> 그림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굵은 곡선들과 특이한 체형, 화려한 색상은 쉴레의

예술적 스타일과 취향이 잘 나타나 있다.

 

작품 속 두 인물은 서로를 꽉 안아주고 있으며,

그 속에는 안정감, 안식, 연민 등의 강한 감정이 담겨

있는데, 실레 자신과 아내인 하름스로 해석된다.

 

      < 에곤 실레의 뮤즈였던 발부르가 노이질 >

 

 

발부르가 노이질은 클림트가 실레에게 소개해준 모델로, 

애칭은 발리였다.

실레가 노이질을 만나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21살,

노이질은 17살이었다.

 

노이질은 모델뿐만 아니라 실레의 정신적 동반자였고,

실레가 미성년자 납치 및 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구금됐을 때나 군에 복무하게 되었을 때도 그의 곁을

지키며 헌신했다. 

 

그러나 차츰 미술계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안정된 생활을

원했던 실레는 가난한 모델이지만 조강지처와도 같은

노이질에게 이별을 고했다.

실레와 헤어진 노이질은 그 후 제 1차 세계대전에 종군

간호사로 참전했고, 1917년 발칸반도의 한 야전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 에곤 실레의 아내가 된 에디트 하름스 >

 

 

에곤 실레가 노이질을 버리고 아내로 택한 여인은

에디트 하름스였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교양 있는 여인이었으며,

실레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도 있었다. 실레는 1915년 하름스와 결혼했다. 

 

                                   < 가족(1918년) >

 

  

아내 하름스가 임신을 하자 실레는 아기가 태어난 후의

단란한 가정을 상상하며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 가족은 실레와 하름스 그리고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이다.

실레의 팔과 다리는 가족을 감싸 안고 품어주려는 듯

길쭉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오랜 가난과 고생 끝에 행복이 오는가 싶던

실레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덮쳤다.

1918년 10월, 임신 6개월의 하름스가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고, 사흘 뒤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 에곤 실레가 그린 구스타프 클림트 >

 

 

에곤 실레는1907년 평소 존경했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유럽 미술계의 변방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럽 미술의

흐름을 체감할 기회가 적었는데, 실레는 클림트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실레보다 스물여덟 살이나 많았던 클림트는 예술적으로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며 죽을 때까지 실레를

후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