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거기 가봤나?"
울산광역시 울주군 선영에 자리한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1922 - 2020년) 회장의 묘비 와석에 새겨진
문구이다.
신격호 회장은 평소에 임직원들에게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거기 가봤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신 회장의 "거기 가봤나?"라는 말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자주 했다는 '이봐, 해봤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신 회장이 이처럼 임직원들에게 "거기 가봤나?"며
현장을 중시한 이유는 롯데의 주력 사업인 유통과
숙박업에 있어서 좋은 입지의 땅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눈과 발로 현장을 확인할 것을
자주 당부했다.
그는 국내에 머무를 때면 롯데백화점이나 롯데호텔 등에
불쑥 나타나 매장을 둘러보고 고객 서비스와 안전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는 등 현장경영을 몸소 실천했다고 한다.
신 회장이 잠실 유수지 한복판에 테마파크와 호텔,
백화점, 쇼핑몰을 아우르는 거대한 복합단지 조성을
계획하자 당시 롯데 임원들은 배후상권이 없어 장사가
안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 회장은 잠실 일대가 머지않아 명동만큼
번화한 곳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2017년 한국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123층 555m 높이의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됨으로써 신 회장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잠실' 하면 '롯데'를 떠올리게
되었다.
신 회장 묘의 와석에는 "여기 울주 청년의 꿈
대한해협의 거인 신격호 울림이 남아 있다"라는
글귀도 함께 새겨져 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
빈손으로 출발해 세계적인 유통·식품 그룹을 일궈낸
그의 성실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922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난 신격호 회장은 1941년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껌 하나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롯데는 초콜릿, 캔디 등으로 생산 품목을 확대하며
20여 년 만에 일본 굴지의 종합 제과업체로 우뚝 섰다.
신 회장은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명동에 롯데호텔을 짓고, 롯데제과 등을 설립하며
국내 사업에도 나섰고, 그 후 식품, 유통은 물론 관광과
건설, 화학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 국내 굴지의
재벌 그룹으로 성장했다.
신 회장은 홀수 달에는 한국에, 짝수 달은 일본에
머물며 경영활동을 펼쳐 '셔틀경영'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신 회장은 젊었을 때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매료되어 베르테르가 사랑한 여인의
이름을 그룹의 명칭으로 정했다고 하니 신 회장의
감성이 느껴지는 듯도 하다.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의 공동 창업주였던 제리 볼드윈이
자신이 좋아하던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삼은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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