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
2020년 당시 94세의 최고령 현역 의사였던
한원주(1926 - 2020년) 원장의 묘비문이다.
한원주 원장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그는 아흔네 살 되도록 매일 병실을 돌며 환자를
돌봤으며, 죽기 한 달 전까지 늘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도 옅게 발랐다고 한다.
흰머리를 가리는 검은 모자는 한원장의 상징이었다.
그는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살아 있어야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말하곤 했다.
1926년 경남 진주의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려대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를 딴 뒤 물리학자였던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10년 동안
미국원호병원 등에서 근무한 뒤 1968년 귀국했다.
당시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많지 않아
그가 귀국해 의원을 여니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돈도 제법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1979년 여름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때문이었다.
병원을 정리한 뒤 봉사의 삶으로 뛰어든 그는 소외된
이웃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치고 어루만지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여든두 살부터는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종신계약을 맺고
일을 했다.
"병은 사랑으로 나을 수 있다."는 지론으로 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태도와 ‘국내 최고령 현역 여의사’라는
이력 때문에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열심히 일한 일생에는 조용한 죽음이 찾아온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처럼 그는 죽기 얼마 전까지
환자를 돌보다가 2020년 9월 30일 94세를 일기로
평온하게 잠들었다.
그는 구십여 평생 3분의 2를 의사로, 의사 직함을 가진
뒤로는 40여 년 세월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술을 폈다.
그런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임종 전 가족과 요양병원 직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 세 마디였다고
한다. 그의 묘비문으로 새겨진 세 마디의 작별 인사에서
따뜻함과 정겨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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