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한 바탕 잘 놀았다"
로맹 가리가 남긴 유서의 마지막 부분 "한바탕
잘 놀았다. 고마웠다. 그럼 안녕히......"에서 따온
그의 묘비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로맹 가리(1914 - 1980년)는
소설 보다 더욱 소설 같고, 드라마 보다 더욱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업가였으며, 어머니는 배우였다.
14살 때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프랑스 니스로
옮겨왔으며, 1934년 파리 법과대학에 입학한 이듬해
프랑스로 귀화했다.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자유 프랑스군으로 복무했고, 그 공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41년부터 20년간 외교관으로 일을 하면서
여러 소설을 발표했다.
데뷰작인 <유럽의 교육>으로 프랑스 비평가상을
받았으며, 1956년에 발표한 <하늘의 뿌리>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로맹 가리는 1944년 패선잡지 '보그(Vogue)'의
편집장인 레스리 블랜치와 결혼했으나 이혼한 뒤,
1959년에 헐리우드 출신 24살 연하의 영화배우
진 시버그와 결혼했으며, 자신이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즈음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학계의 스타가 되었으나,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평론가들의 극심한 비판을 받아
심적 고통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인 진 시버그가 영화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불륜관계에 빠져 로맹 가리는 그녀와
이혼을 하게 되었으며,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75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장편 소설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 상을
또 다시 수상했다.
공쿠르 상은 같은 작가가 두 번 받을 수 없는 것이
원칙인데도 수상이 가능했던 것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 후 1979년, 이혼한 부인 진 시버그의 실종 사건이
발생했는데, 얼마 후 그녀는 자신의 차 뒷좌석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로맹 가리는 진 시버그가 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에게 살해당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혼한 부인 진 시버그가 죽은 1년 뒤인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는 자신의 입 안에 권총을 쏘아
66세로 생을 마감했다.
로맹 가리는 자살하기 전 유서를 남겼는데, 그 유서는
얼마 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자로
발간되었다.
로맹 가리는 유서에서 '에밀 아자르'가 자신이였음을
밝혔다.
그리고는 자신이 '로맹 가리'라는 본명으로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평론가들을 거세게 비난함으로써
죽은 후에도 프랑스 문단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렇듯 조종사, 외교관, 소설가, 영화 제작자로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프랑스 문단의 전설 로맹 가리는 어찌 보면 자신의
묘비문처럼 한바탕 잘 놀다 간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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