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자연의 섭리이자 우주의 원리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인간은 무(無)에서 태어나 유(有)를 이뤄 한 평생 살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
어떤 죽음을 맞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삶이 담보한다고 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그 죽음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 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다. 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인고유일사, 사유중어태산, 혹경어홍모)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책을 쓰기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궁형을 당한 치욕을 딛고 부친의 유언이기도 한 역사서 편찬에 자신의 삶을 걸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이 애처롭고,
사람은 죽음이 가까우면 그 말이 선해진다.
鳥之將死 其鳴也哀 (조지장사 기명야애)
人之將死 其言也善 (인지장사 기언야선)
새는 단지 죽음을 두려워 할 뿐이지만 사람은 죽음과 같은 궁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근본을 돌아본다는 의미로 대학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증자의 말이다.
꽃다운 이름과 그 향기는 백 년을 가고,
더러운 이름과 그 악취는 만 년을 간다.
遺芳百歲 遺臭萬年
(유방백세 유취만년)
중국 항주에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 만큼이나 국민적 영웅으로 모셔지는 악비 장군 묘가 있다.
악비 장군은 남송시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간신 진회의 모함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악비의 묘 앞에는 그를 죽게 한 진회 부부의 포박당한 동상이 있는데, 악비 장군에게 참배를 마친
관람객들은 진회의 동상에 침을 뱉고 때리고 욕을 하며 나온다고 하니 옛 말이 틀림이 없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후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향기로운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당나라의 시인 이백은 술을 매우 즐겼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속설들이 있다. 채석강에서
술을 마시고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거나, 고래가 나타나 하늘로 데려 갔다고도 한다.
훗날 많은 문인들은 이백이 죽었다는 채석강변에서 시 한 수씩을 읊고 지나갔다.
명나라 시인 매지환은 목장(木匠)의 시조로 불리는 '노반' 고사를 인용한 제이백묘시(題李白墓詩)를
지어 사람들을 풍자했다.
採石江邊一堰土 伯毅名醫天高高 (채석강변일언토 백의명의천고고)
來來往往一首詩 魯班門前弄大斧 (내래왕왕일수시 노반문전농대부)
채석강변에 한 무더기 흙, 이백의 이름은 천고에 높은데
오고 가는 사람마다 시 한 수씩을 읊조리니
노반의 문 앞에서 도끼 자랑하는 격이로구나.
매지환의 이 시로 인해 노반의 집 문 앞에서 도끼 자랑하는 것처럼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한다는
반문농부(班門弄斧)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초한전쟁의 항우가 죽은 천 년 뒤 그가 최후를 마친 오강변 정자에서
제오강정시(題烏江亭詩)를 지어 젊은 나이로 죽은 항우에 대한 연민의 정을 표했다.
勝敗兵家事不期 (승패병가사불기)
包羞忍恥是男兒 (포수인치시남아)
江東子弟多才俊 (강동자제다재준)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미가지)
승패는 병가지상사여서 기약할 수 없는 법,
수치를 끌어안고 치욕을 참아야 남아인 것을.
강동의 자제들 재주 있는 인재들이 많아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돌아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돌아온다는 권토중래(捲土重來)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힘을 길러
다시 승리와 성공을 도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오늘 날까지도 재기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고사가 되었다.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이 무엇인가 물었다. 공자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사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未知生 焉知死
(미지생 언지사)
사는 동안 인간답게 잘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니,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하여 고민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늘 사람다운 삶에 관심을 두었던 공자의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답이다.
죽은 후에 묘당에 소중히 받들어지는 거북이 보다는 비록 진흙탕에서 천하게 꼬리를 끌며 다닐지라도
살아 있는 거북이로 지내는 것이 낫다는 장자의 영구예미(靈龜曳尾) 일화가 있다. 유유자적 소요유를
즐기며 살았던 장자다운 말이다.
好死不如惡活 (호사불여악활) 호사스런 죽음보다 고생스런 삶이 낫고,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 보다 이승이 낫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의 자살은 우리를 안타깝고 슬프게 한다.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번의 기회 밖에 주어지지 않은 것이 인생이고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불사의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오 백여 년을 지속한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제 조차도 불사약을 구해 오겠다는 서불에게 농락을 당한 일화에서 죽음 앞에 나약하기 그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클래식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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