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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 화가 박수근

물아일체 2023. 4. 13. 04:16

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에 있는 박수근

(1914 - 1965년) 화가의 묘비문이다

그의 묘비문은 가난과 질병으로 힘들었던 지난 날의

삶을 표현한 마지막 말이었다.

 

박수근은 평생 가난에 시달렸으며, 자신의 화실조차

갖지 못했고, 개인전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달아 회고전이 열리고,

작품들은 고가로 팔리기 시작했다.

 

빨래터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나 평범한 서민의

일상을 소박하게 담아낸 작품을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고

있지만, 생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화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수근은 소재를 극도로 단순화하고, 공간감을

무시하며 대상을 평면화한 화풍을 통해 절제의 미와

한국인의 민족 정서를 표현했다.

 

또한, 화면 바탕의 처리방식이 독특하여 두툼한

질감을 느끼게 하며, 회색 등 무채색 계열을

기조색으로 사용해 깊이 있고 무게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물가

 

박수근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화가로 입문했으나,

가난으로 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1940년, 그는 같은 동네에 살던 김복순이라는 여성과

결혼하고, 평양시청에서 서기로 일하며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

 

1945년 해방 후 평양을 떠나 강원도 금성여중에서

미술교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으나,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자 피난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박수근은 홀로 서울에 도착했다.

가족과는 1952년에야 극적으로 상봉했다.

 

나무와 두 여인

 

가족은 만났으나 전쟁 중이라 생계가 막막해진 박수근은

미군 PX에서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박수근은 이때 훗날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박완서를 만났다.

당시 박완서는 박수근을 비롯한 한국 화가들이

미군들에게 판매하는 그림의 회계업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박완서가 소설가로 등단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박완서가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70년으로, 박수근이

죽은 뒤였지만, 박완서는 박수근의 유작 전시회를 보고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나이 마흔의 늦은 나이에 여성동아 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등단한 박완서의 소설 < 나목(裸木) >의 등장인물인

화가 '옥희도'의 실제 모델은 박수근이다.

 

또한,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인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에서는 박수근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로 아예 본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박수근은 1953년부터 미군 PX에서의 초상화가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해 국전에 입선하는 등

미술계에서 화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잠깐에 불과했고, 작품에 한창 전념할

나이에 병에 걸렸다.

박수근은 신장과 간이 나빠진 데다 실명까지 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1965년 4월 6일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너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기 업은 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