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
묘비문으로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비석을 무자비
(無字碑)라고 한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왕과 황제 가운데
단 한 명의 여자 황제가 있으니 그녀는 측천무후이다.
측천무후가 남편인 고종과 함께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
시안 인근의 건릉에는 높이 8미터의 거대한 무자비
(無字碑)가 세워졌다.
이는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른 것으로, 그녀가 자신의
묘비에 아무런 글도 쓰지 말라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의 업적이 참으로 크니 도저히 글로써 남길 수
없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차마 글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부끄러움과 겸양의 표현일 수도 있는데,
그 진의(眞意)는 죽은 측천무후만이 알 것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의 황후였지만
황태자들을 연이어 폐위시킨 뒤 자신이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의 이름을 '주(周)'로 고치고, 15년 간 중국을
다스린 여인이다.
측천무후의 인생은 지난했다.
그녀가 처음 궁에 들어온 것은 열세 살 때,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 되어서였다.
그로부터 11년 후 태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그녀는
비구니가 되어 절에 들어가 살게 되었는데,
태종의 아들 고종은 궁을 떠난 무후를 잊지 못해
절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고종의 황후 왕씨 덕분이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왕씨는 아들을 낳은 다른 후궁을
견제하기 위해 측천무후를 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얼마 되지 않아 왕씨를 축출하고
고종의 황후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고종의 황후로 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 시대를 맞게 된다.
측천무후는 683년 고종이 죽자 여러 아들과 손자들을
황제에 즉위시켰다가 폐위시키는 과정을 거쳐 자신이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690년, 그녀의 나이
서른한 살 때의 일이다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반대 세력에게는 잔혹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백성들의 삶은 안정되었다.
문벌을 타파하고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으며,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해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했다.
측천무후는 화려한 남성편력을 즐긴 여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전국에서 젊고 잘 생긴 남자 삼천여 명을 뽑아
궁궐에 머물게 하고, 그들과 밤마다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황제의 자리에 앉아 15년 동안 주(周)나라를
통치하다가 705년, 82세에 사망했다.
그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아들 이현(중종)은 국호를
다시 '당(唐)'으로 환원시켰고, 당나라는 이후로도 200년
넘게 왕조를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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