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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 장미의 시인 릴케

물아일체 2022. 10. 25. 06:30

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

 

스위스 라롱에 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의 꽃

겹겹이 눈꺼풀처럼 쌓인 꽃잎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자는 즐거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 - 1926년)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시 '장미'이다.

릴케는 시의 소재로 장미를 많이 사용하고, 장미를

사랑했기에 '장미의 시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릴케는 어느 날 연인에게 자신이 가꾼 정원에서 장미를

꺾어주려다 가시에 찔렸고, 그 상처를 통한 세균 감염이

원인이 되어 급성 백혈병으로 5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묘비문의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장미는 결국 릴케에게

사랑과 죽음이라는 모순의 꽃이 되고 말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는 20세기 독일 최고의 실존주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근대 사회의 모순, 번뇌, 고독, 불안,

죽음, 사랑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토대로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시를 많이 썼다.

 

유일한 장편소설인 '말테의 수기'는 현대 모더니즘

소설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젊은 릴케가 시인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이 ‘루 살로메’라고 하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당대의 유명한 여성이다.

 

작가 겸 평론가였으며 정신분석 학자이기도 했던

루 살로메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매력적인 엘리트

여성으로, 독일의 니체라든가 오스트리아의

프로이트와도 한때 사귀었다.

 

당시 36세의 루 살로메는 22세의 릴케보다 열네 살

연상이었기에 루 살로메는 릴케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릴케의 인생에 있어서 정신적 지주였던 루 살로메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으세요.

나는 당신을 내 마음으로 잡을 것입니다.
내 심장이 멈추게 하세요.

그러면 내 머리가 고동칠 것입니다.
당신이 내 머리에 불을 지르면

그때는 내 핏속에 당신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릴케가 지은 '내 눈을 감기세요'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 시에서 릴케가 애절하게 찾는 '당신'이 바로

루 살로메였다. 

 

루 살로메와 함께 했던 러시아 여행은 릴케로 하여금  

시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촉진하였고,

그의 진면목을 떨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릴케는 또한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

릴케'라는 본래 이름을 루 살로메의 조언에 따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기도 했다.

 

4년 뒤 릴케는 그녀와 헤어져 연하의 여성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루 살로메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평생을 두고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백석, 김춘수, 윤동주 같은 시인들도

릴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특히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는 릴케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릴케의 시 '가을날'은

한국인들이 애송하는 가을 명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를 알차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빛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에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못합니다.

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살 것이며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바람에 나뭇잎이 구를 때면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사이를 헤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