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은 기원전 4세기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이다.
상앙은 본래 위(衛)나라 출신이었으나, 서자 신분이라
위나라에서는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생각해 진나라로
갔고, 진나라 왕 효공에게 부국강병을 유세하여 신임을
얻었다.
진왕 효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배경으로 상앙은 귀족의
세습 특권을 폐지하고, 군공(軍功)의 크고 작음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는 제도와 연좌법을 시행하는 등 강력한
개혁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러한 상앙의 개혁정책은
훗날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 백성들의 신뢰가 우선이다 >
상앙은 개혁 초기에 부국강병을 추진하는 법률을
제정하고도 그것을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개혁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백성들의 신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상앙은 그리 크지 않은 나무기둥을 도성 남문에
세워 놓고, 그것을 멀지 않은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상금으로 10 금을 준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의심하며 비웃자 상앙은 상금을
50 금으로 올렸고, 어떤 젊은이가 나서서 속는 셈치고
기둥을 옮기자 즉석에서 50 금을 그에게 주었다.
이러한 광경을 본 백성들 사이에는 나라에서 하는 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싹트게 되었고, 진나라는 점차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유래한 '이목지신(移木之信)' 또는
'입목득신(立木得信)' 고사성어는 ‘나무 기둥을 옮겨
신뢰를 얻는다’는 뜻으로, 위정자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 법 적용에는 예외가 없다 >
어느 날 태자가 법을 어기는 일이 발생했다.
상앙은 “법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위에서 법을 어기기
때문”이라며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기로 했다.
그러나 태자는 왕위를 이을 신분이어서 그를 직접
처벌할 수는 없으므로 태자의 시종과 스승을 대신
처벌했다.
상앙이 마련한 새로운 법령이 시행되자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불만이 많았지만,
강력한 처벌이 두려워 모두 법령을 따르게 되었다.
그의 법이 시행된 지 10년이 되자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지 않을 정도로 진나라의 사회는
안정된 모습을 갖춰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당대의 현자 조량은 "극형으로 사람을 다스리니
원한을 사고, 재앙을 쌓아놓은 것이다."라며 비판했다.
겉으로 보기에 사회 질서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혹독한 법 집행과 처벌을 두려워한 결과일 뿐이니
어찌 좋은 통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 작법자폐의 부메랑 >
세월이 흘러 상앙의 개혁정치를 강력하게 밀어주던
진왕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귀족들은
상앙이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하였다.
태자 시절 상앙과 안 좋은 인연이 있었던 왕은 상앙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상앙은 도망을 가다가 어느 객사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으려 했는데, 상앙을 알아보지 못한
객사 주인은 "신분이 불확실한 사람을 숙박시키면
상앙이 만든 연좌죄를 범하게 되어 처벌받는다."며
거절하였다.
상앙은 “아,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나에게까지
미치는구나.”라고 탄식하였다.
결국 상앙은 진나라 군대에 체포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죽었는데, 이 또한 그가 만든 법에 나오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여기서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말이 유래되었는데,
자기가 한 일로 인하여 자신이 고난을 받게 되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제 무덤 제가 팠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상앙이 죽은 후에도 그가 만든 법은 계속 시행되어
진나라가 강국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결국 가혹한 법 집행과 처벌이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
진나라는 진시황의 천하통일 후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믿음과 신뢰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에게
신뢰를 잃으면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탄핵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고,
그 정권이 불과 5년 만에 다시 교체되며 국민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양분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관용과 포용,
그리고 협치에 여야 정치인은 물론, 국민 모두의 노력이
무엇 보다 절실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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