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 때의
품팔이 농사꾼이었던 진승은 진나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는 시발점이 된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자(字)는 섭이다.
진승은 어느 날 남의 농사일을 하던 중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장래에 부귀한 몸이 되거든
서로 잊지 맙시다.”
진승의 말에 주위의 동료들은 “남의 농사일이나 하는
주제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며 핀잔을 주었다.
진승은 동료들의 이러한 비웃음에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알겠는가(燕雀安知
鴻鵠之志 연작안지 홍곡지지).”라며 탄식했다.
진승의 이 말에서 유래한 '연작홍곡(燕雀鴻鵠)'은
소견이 좁은 사람은 뜻이 큰 사람의 야망이나 포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말을 남들이 진심으로 알아듣지 못할 때
자탄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500여 년 동안 지속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제국을 이룬 진시황이 지방을 순행하던 중
사구라는 곳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이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는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해
장남인 부소를 자살하게 만들고, 어수룩한 막내 아들
호해를 2세 황제에 등극시켜 국정을 농락한다.
진시황 때 보다 더한 폭정과 가혹한 형벌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가던 기원전 209년,
진승은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900여 명의 인력을
인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일행이 대택향에 이르렀을 때 큰 장마가
계속되어 길이 막힌 탓에 지정된 날짜까지 목적지에
도착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진나라 법에 기일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참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진승은 친구인 오광과 상의한 후 일행의 앞으로
나아가 일장 연설을 했다.
“우리는 모두 기한을 어기게 되어서 어차피 참수를
당할 것이오.
기왕에 죽을 바에야 대장부다운 일을 한 번 해봐야
하지 않겠소?
왕과 제후, 장군과 재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소!
(王侯将相 寧有種乎 왕후장상 영유종호)
우리도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는 사람의
신분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문장으로, 능력이 있고 포부도 크지만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탓에 뜻을 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신종 때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이
진승이 말한 '왕후장상 영유종호'를 인용하며
한국사 최초의 신분해방운동인 '만적의 난'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진승의 연설을 들은 일행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호응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 최초의 농민 봉기라고 할 수 있는
진승오광의 난은 시작되었고, 봉기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진승은 국호를 장초(張楚)로 명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얼마간 세력을 떨치기도 했지만, 진나라의
조직적인 토벌작전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봉기를 일으킨 진승은 비록 6개월 만에 죽었지만
그가 일으킨 진승오광의 난은 항우와 유방 등으로
이어져 결국 통일제국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하고
새로운 한나라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쓰면서 농사꾼 출신인 진승을
파격적으로 제후들의 반열에 넣어 세가(世家)에
포함시킴으로써 진승오광의 난이 갖는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과거 왕조시대에는 신분이 세습되었고, 그러한 신분
세습을 타파하기 위해 진승과 오광, 그리고 만적은
'왕후장상 영유종호'를 외치며 신분해방운동을 벌였다.
오늘날은 부(富)가 세습되고, 그 부가 사회적 신분이 되어
계층의 벽을 만들고 있다. 부가 새로운 신분이 된 것이다.
부의 불평등이 심하더라도 사회 안에서 계층간의
이동성이 충분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계층간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면 개천에서 평생을
가재나 붕어나 개구리로 살아야 하는 흙수저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고, 그들에게서 또 다시 '왕후장상
영유종호'의 구호가 나올 수도 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복원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무엇 보다 시급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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