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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치욕을 참아 청사에 이름을 남긴 사마천과 구우일모(九牛一毛)

물아일체 2022. 8. 30. 07:30

사마천은 고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태사령 직책을

지낸 사관이었다.

역시 태사령으로 한 무제를 모셨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중국 고대부터 당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사기(史記)'의 완성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긴 채 죽었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저술에 착수했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의 집필에 몰두하던 어느 날,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 무제의 명령으로 북방의 흉노족 정벌에 나섰던

이릉 장군이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흉노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한 무제와 조정 대신들은 이릉 장군을 비난하며

그의 죄를 문책하는 어전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사마천은 이릉의 과거 전공과 인품을

들어 그의 투항이 중과부적 때문이었으며, 총사령관인

이광리 대장군의 작전과 전략상의 실패도 고려해야

한다고 이릉 장군을 변호한 것이다.

 

사마천의 이릉 장군 변호에 한 무제는 진노했고,

사마천은 투옥되어 사형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한 무제가 이처럼 화를 낸 것은 이광리 대장군이

한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이부인의 오빠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형수는 속전 50만 전을 내거나, 궁형(거세형)을

자청해 내시가 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50만 전을 구할 길이 없었던 사마천은 고심 끝에

궁형을 선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천은 더 없는 치욕을 당하고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48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사마천이 당시 형벌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궁형을 자청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이유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선친의 유지인 '사기'의

집필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기원전 96년, 사마천은 집필에 착수한 지

18년 만에 위로 황제(黃帝) 시절부터 한 무제 때까지의

3천 년 고대 중국 역사를 총망라한 '사기'를 완성했다.  

불후의 명저로 평가 받고 있는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등으로 구성된 총 130권, 52만 6,500 자의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치욕과 분노를 삭이며 '사기'를

집필할 당시의 심정을 '보임안서(報任安書)' 또는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고 불리는 글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보임안서'는 한 무제 때 일어난 반란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둔 임안 장군에게 보낸 사마천의

편지글이다.

 

사마천은 장문의 편지에서 임안 장군을 도울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구구절절 이해를 구하는 한편,

자신이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살아남은 까닭과

심정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만약 내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 뽑히는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의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사람들은 나를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지혜가 모자라고 죄가 극에 달해 

죽음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이 글에서 '구우일모(九牛一毛)' 고사성어가 유래했는데,

이는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 털 하나라는 뜻으로,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人固有一死 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인고유일사 혹중어태산 혹경어홍모 용지소추이야)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는데,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의 깃털보다 가볍다.

그것은 살면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태산홍모(泰山鴻毛)’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는데, 죽음의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매우

큰 것을 비유하거나,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비유하는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사마천은 또한 그 동안 지내온 자신의 삶을

'대분망천(戴盆望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하늘을 바라볼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밖에 나가 친구를 사귀는 것도

삼가하고, 가사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부족하나마 밤낮으로 직분에 충실해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대분망천'이란 머리에 동이를 이고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번에  가지 일을  수는 없으니

자신이 맡은 바 한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무에서 태어나 유를 이뤄 한 평생 살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가 어떤 죽음을 맞는가는 전적으로 그의 삶이

담보한다고 할 것이다.

 

사마천의 '보임안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떠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명문장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