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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집념과 복수의 화신 오자서와 일모도원(日暮途遠)

물아일체 2022. 6. 15. 07:49

정권 교체를 목전에 둔 지난 4월 하순,

당시 김오수 검찰총장이 이른바 검수완박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처리와 관련해

박범계 법무부장관을 항의차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때 박 장관은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었다."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김 총장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여 언론의 많은 보도가 있었다.

 

"갈 길은 먼데 날은 저물었다."는 말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 쓴 역사서 ‘사기’의 ‘오자서 열전’에

나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을 풀이한 문장으로,

할 일은 많은데 남은 시간이 없어 초조하고
다급한 상황을 가리킬 때 자주 인용된다.

 

기원전 6세기 춘추시대 초나라 출신의 오자서는

집념과 복수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사마천이 쓴 '오자서 열전'은 '사기'에 수록된 70편의

열전 가운데 가장 많은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장편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와신상담의 오월쟁패 한복판에 섰던 오자서의 일생이

워낙 파란만장하다 보니 여러 고사성어가 만들어지기도

했고, 영화나 TV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오자서의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 왕을 가까이서 보좌한

명문가문으로, 아버지인 오사는 초 평왕의 태자였던

건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간신 비무기(비무극)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는 등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오자서는 초나라를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오나라로 갔고,

평생을 가문의 원수를 갚는데 바치게 된다.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물고기 요리 뱃속에 비수를

감추었다가 오왕 요를 암살한 '어복장검(魚腹藏劍)'

일화의 주인공인 자객 전제를 이용해 공자 광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오왕 합려이다.

 

큰 공을 세운 오자서는 재상으로 임명되어 합려를

측근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얼마 후 합려는 오자서의 요청으로 군대를 동원해

초나라 수도를 함락했지만,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 초 평왕은 이미 죽어서 땅에 묻힌 뒤였다.

 

이에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어

삼백 번의 채찍질을 가하는 '굴묘편시(掘墓鞭屍)'

보복을 가했다.
굴묘편시란 묘를 파헤쳐 시신에 매질을 한다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도를 넘는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오자서의 이러한 행동에 친구인 신포서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비난하자 오자서는 "일모도원,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다."고

강변했다.

 

그 후 오왕 합려는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죽게 되고,

둘째 아들 부차가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이 된 부차는 와신(臥薪),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아버지 합려의 복수를 다짐한 끝에 드디어 월나라를

공격해 월왕 구천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오왕 부차는 아버지와 달리 오자서를 멀리해,

"월왕 구천을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고, 월나라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은

간신 백비의 말에 따라 구천을 살려주었다. 

 

오왕 부차가 계속해서 간신 백비의 잘못된 계책을

받아들이자 오자서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아들을 그 곳에 남겨둔 채 돌아 왔는데,
백비가 이를 모함하자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

명하였다.

오자서의 집념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오자서는 탄식하며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오왕 부차의 관을 짤 나무로 쓰고, 내 눈을 빼서

동쪽 성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을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오자서가 죽은 뒤 오왕 부차는 결국 상담(嘗膽),

즉 매일 쓰디쓴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한

월왕 구천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오자서의 섬뜩한 유언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와신상담의 오월쟁패도 끝이 나게 되었다.
 

오자서는 죽은 지 약 천 년이 지난 당나라 

'영렬왕'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수성

소주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오상사'가 있다고 한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오자서 열전'에서  

"사람이 품은 원한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일찍이 오자서가 아버지를 따라 같이 죽었다면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슨 차이가 있었겠는가? 

그는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 후세에 널리

이름을 남겼으니 그 뜻이 참으로 비장하구나!"라고

기록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굴욕을 힘들게 참아냈다는 부분에서

나름 자신과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사마천

오자서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의

오자서의 집념과 복수에 대해 긍정적 평가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았다.  

 

복수의 원한을 갖고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도 

망치는 일이다.

복수와 보복 이야기는 듣는 입장에서는 재미있고 

통쾌할 수도 있겠지만, 필연적으로 또 다른

복수와 보복을 부르게 마련이므로 그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정권이 바뀌면 여지없이 적폐청산과 정치보복 논쟁이

뜨거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남아공 대통령이었던 만델라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백인으로부터의 오랜 차별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복수를 하지 않고 용서를 통해 

화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복수를 위해 한평생을 허비하지 말고, 

용서를 통해 한을 푸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기억하되 용서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복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