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 초반,
각국은 초강대국이 된 진(秦)나라의 위세 앞에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趙)나라 혜문왕은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희대의 보물 화씨벽(和氏壁)이라는 아름다운 옥구슬을
얻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진나라 소양왕은 자기 나라의 15개
성을 줄 테니 화씨벽을 달라고 조나라에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화씨벽을 빼앗기 위한 진나라의 술책에
불과했다.
조왕도 진왕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제의를
무시했다가는 진나라의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이 뻔해
어찌해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 때 한 신하가 자신의 식객으로 있던 인상여를
추천했고, 왕은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나라가 화씨벽만 챙기고 성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상여가 대답했다.
“신이 화씨벽을 가지고 사신으로 가서 15개 성을
받게 되면 진왕에게 화씨벽을 주고 오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화씨벽을 반드시 우리 나라로 온전히
가지고 돌아 오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격적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진나라로 가
소양왕에게 화씨벽을 바쳤다.
진왕은 화씨벽을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기뻐하면서도
교환조건으로 내건 15개 성 이야기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진왕의 속셈을 확인한 인상여는 진왕에게 화씨벽에
조그만 하자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주겠다고 속여
화씨벽을 도로 손에 넣었다.
그리고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화씨벽을 바닥에 던져 박살 내고,
자신은 기둥에 머리를 박아 자결하겠다고 큰 소리로
위협하며 진왕의 신의 없음을 꾸짖었다.
인상여의 돌발 행동에 놀란 진왕은 즉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상여는 더 이상 속임수에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왕에게 닷새 동안 목욕재계한 다음
예를 갖추어 화씨벽을 받으라고 요구하며 시간을 끌었다.
진왕은 도저히 화씨벽을 강탈할 수 없음을 알고
인상여의 제안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인상여는 진왕이 결코 약속을 지킬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수행원을 시켜 화씨벽을 조나라로 은밀히
되돌려 보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닷새 동안 목욕재계를 끝낸 진왕이
인상여를 불러 화씨벽을 요구하자 인상여는 진왕에게
사실을 말하고 죽음을 청했다.
진왕은 화가 치솟았지만, 인상여를 죽인다고 화씨벽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에 대한 나쁜
소문만 날 것이므로 인상여를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인상여의 용기와 지혜로 화씨벽은 조나라로 온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물건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온전하게 되돌려 놓는다는 뜻의 ‘완벽귀조
(完璧歸趙)’ 고사성어가 유래했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완벽'이라는 단어는 이 완벽귀조의 줄임말이다.
인상여는 어려운 임무를 완수한 공을 인정받아
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3년 후 진나라 소양왕과 조나라 혜문왕이
민지라는 곳에서 만나 회맹을 할 때, 인상여는 조왕을
욕보이려는 진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진왕에게
망신을 주었다.
민지의 회동에서 또 다시 공을 세운 인상여는 조나라의
명장인 염파 장군 보다 높은 상경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염파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이에 염파는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말했다.
"나는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적의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우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그저 입과 혀만 놀렸을 뿐인데
지위가 나보다 높게 되었다.
또한 인상여는 본래 천한 신분이다.
나는 그자 밑에 있는 것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다.
인상여를 만나면 기필코 욕을 보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 장군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회에서는 그와 같은 자리에 앉지 않았으며,
길을 가다가 염파 장군이 보이면 길을 바꾸어 골목길로
피해 다녔다.
인상여의 가신들은 자기들이 모시는 주인의 이런 행동에
실망해 인상여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
이에 인상여는 가신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그대들은 염파 장군과 진나라 왕 가운데 누가 더
세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진왕이 더 세지요."
"나는 그렇게 위엄 있는 진왕을 꾸짖어서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지금 강력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파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면 둘 다
살아남기 힘들지 않겠는가?
내가 이렇게 염파 장군을 피해 다니는 것은 나라의
급한 일이 우선이고, 사사로운 원한은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인상여의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 장군은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염파는 윗옷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진 채
죄인임을 자처하며 인상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비천한 이 몸이 상경의 높은 뜻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 가시 회초리로 죄인을 때려주십시오."
그러자 인상여가 염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두 사람은 마침내 막역한 벗이 되어 함께 나라에
충성하게 되었다.
여기서 '부형청죄(負荊請罪)'와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부형청죄'란 가시나무를 지고 가서 벌 받기를 청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엄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고,
'문경지교'란 서로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사이,
즉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벗이나 사귐을 말한다.
우리나라에도 인상여처럼 개인의 이익과 자존심 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과 용기를 갖춘 관료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작은 조짐에 큰 위기를 예감한 기자와 견미지저(見微知著) (0) | 2022.07.12 |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한 무제의 마지막 사랑 이부인과 경국지색(傾國之色) (0) | 2022.07.08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춘추시대의 문을 연 미녀 포사와 천금매소(千金買笑) (0) | 2022.06.28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관용과 포용의 상남자 초 장왕과 불비불명(不飛不鳴) (0) | 2022.06.21 |
고사성어를 만든 사람들 / 집념과 복수의 화신 오자서와 일모도원(日暮途遠) (0) | 202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