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여인은 '이브'이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최초의 여인은 '판도라'이다.
이브가 헤브라이즘을 대표하는 인류 최초의 여인이라면,
판도라는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림포스의 제왕신 제우스는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신들의 전유물인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물론
인간들에게도 벌을 주기로 마음 먹었다.
형인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묶어두고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하는 한편,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에피메테우스에게는
여인을 보내 보복하기로 했다.
그리스 신화 초기의 인간 세상에는 남자들만 있었고,
여자들은 없었다.
이에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진흙으로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도록 했다.
헤파이스토스가 여인를 빚어내자 제우스의 명령에 따라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은 저마다 여인에게 선물을 주거나
자기가 지닌 재능을 나누어 주었다.
신들로부터 여러 능력을 선물 받은 최초의 여인은
'판도라(Pandora)'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판도라'는 '많은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주어 인간 세계로
내려 보내며 상자를 절대로 열어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형인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의 이름처럼
판도라가 재앙을 일으킬 여인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주는 것을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나중에 아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에피메테우스는 형의 말을 듣지 않았고,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와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제우스가 준
상자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상자 안에는 질병, 슬픔, 욕심, 질투 등 온갖 나쁜
것들이 담겨 있었는데,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그것들이 밖으로 빠져 나와 인간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얼른 상자의 뚜껑을 닫았으나
상자 안의 나쁜 것들은 이미 전부 빠져 나온 뒤였다.
그러나 상자 맨 밑에 있던 희망만은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해서 여전히 상자 안에 남아있게 되었다.
제우스는 이렇게 인간 세상에 재앙을 퍼뜨려
프로메테우스 형제는 물론 불 도적질의 혜택을
누리고 있던 인간에게도 벌을 내린 것이다.
< 판도라 신화가 시사하는 점 >
그리스 신화 속의 판도라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와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인이라는 출발점에
서 있지만 그 둘은 같은 듯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이브는 남편인 아담을 축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의 선물인 반면에, 판도라는 남편인 에피메테우스와
인간들에 대한 징벌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신의 복수의
산물이었다.
성서 최초의 여성인 이브가 아담을 유혹하여 원죄를
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 역시 그녀의 호기심으로 인해
인간에게 온갖 질병과 재난을 가져 왔다는 여성 폄하의
단초가 되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신화에 반영된 것으로, 당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엿볼 수 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고대 동양 사회에서
경국지색(傾國之色), 즉 나라가 기울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나라를 망친 남자들이
그 원인과 책임을 여인의 탓으로 돌렸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판도라의 상자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상자 안에
유일하게 남겨진 '희망'은 인간에게 세상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언제나 희망은 남아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희망이 인간들로 하여금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에 매달리게 하는 헛되고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판도라의 상자‘라는 단어는 '재앙이나 불행을
불러오는 근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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