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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이야기

명화 이야기 / 왕들의 초상화

물아일체 2021. 9. 12. 22:24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까다롭다.

예술적 완성도가 높아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사자의

마음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단지 사람의 얼굴만 그려 넣은 그림이 아니다. 

초상화에는 당시 사회의 트렌드와 주인공의 지위, 성격,

취향은 물론 본인이 강조하고 싶어하는 부분까지 온갖

메시지들이 녹아 들어가야 한다.

 

왕들의 초상화는 자신이 힘과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왕권의 절대성을 강화하려는

통치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따라서 왕들은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화려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초상화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들 가운데는 자신이 그리는

권력자의 모습을 조금도 미화하지 않고 사실대로 그리려

노력했던 사람들도 눈에 띈다.

 

(1) 한스 홀바인의 <헨리 8세>

홀바인은 독일에서 태어나 16세기 초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8세의 궁중 화가로 활동했다.

헨리 8세의 초상화는 풍채가 좋은 통치자의 당당한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림에서 헨리 8세는 다리를 쩍 벌리고 양 주먹을

허리에 짚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창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헨리 8세는 16세기 영국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한 군주이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또한, 첫 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을 하는 과정에서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 교황청의 카톨릭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영국

교회를 만들어 스스로 그 수장이 되기도 했다.  

 

당시 유럽의 변방 이류 국가였던 영국의 헨리 8세는

해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16세기 초부터 함선을

건조하고 해군을 양성하는 등 국력을 강화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헨리 8세가 양성하기 시작한 영국 해군은 반 세기 후,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등 해양강국으로 발돋움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 니컬러스 힐리어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는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고 하면서

죽는 날까지 '처녀 여왕'으로 지냈는데,

그녀의 초상화에는 이 같은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처녀성과 영원성을 상징하는 불사조 모양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불변과 순수를 뜻하는 검은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했다.

의복은 순수를 상징하는 진주로 장식했고, 손에는

튜더 왕가를 뜻하는 붉은 장미를 들었다.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1세는 25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넘게 잉글랜드를

통치한 영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왕이다.

이른바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불리는 그녀의 통치기에

잉글랜드는 정치와 상업 및 예술 분야에서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3) 프란시스코 고야의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사실주의화로 유명한 스페인의 화가 고야가 그린

이 그림은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14명의

단체 초상화이다.

그림에서는 고야가 왕족에게 보내는 냉소적인 시선이

여기저기에 묻어난다.

 

화면 중앙에 있는 왕비는 매우 오만할 뿐 아니라

정숙하지 않은 여인으로, 재상과 불륜의 관계에

있었다.

국정에 무능했던 왕은 왕비의 위세에 눌려 주눅 든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다.

다른 식구들도 화면 속에 제각각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야는 왕과 그의 가족을 허영과 탐욕, 무능의

화신으로 그렸지만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복장과 장식을 매우 화려하고 멋있게

그려준 덕분이었다.

고야의 눈에 비친 왕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화려한 옷에 둘러 쌓인 천박한 존재에 불과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 같은 유럽의 격동기에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4세는 자질과 역량이

부족했다.

결국, 카를로스 4세는 프랑스의 침공으로 아들과 함께

강제 퇴위되었고,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4) 이아생트 리고의 <루이 14세>

 궁중화가였던 이아셍트 리고가 그린 이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인간적 허세와 특성을 잘 표현했다.

그림에서 그는 검고 풍성한 머리결을 자랑하며

프랑스 왕가의 상징인 백합문장으로 장식된

중후한 외투를 걸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위엄을 뽐내고 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루이 14세의 나이는

63세였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루이 14세는
'태양왕'으로 불린 절대군주의 전형이다.

그는 70년 넘게 왕위에 있었으면서 봉건귀족들을

복속시켜 왕권을 강화했으며, 지속적으로 외국과

전쟁을 벌여 영토 확장을 꾀했다.

또한,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귀족들을 모아

파티를 자주 열었던 덕분에 문학과 예술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잦은 전쟁과 사치는 고질적인 재정

악화로 이어져 프랑스 혁명의 먼 원인이 되었다.

 

(5) 도미니크 앵그르의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회화를 이끈 앵그르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이다.

나폴레옹은 35세에 황제가 되었고, 앵그르는 26세 때

아무도 주문하지 않은 이 작품을 그려 전시회에

출품했다. 젊은 화가에게 젊고 강인한 황제가 우상으로

비쳐줬음을 짐작하게 한다.

 

나폴레옹이 높은 옥좌에 앉아 관람객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보인다.

황금 월계관을 쓴 나폴레옹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정면을 향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앉아 있다.

오른 손에는 카를 대제의  '정의의 손' 지팡이를

쥐고 있다.

흰색 족제비 털을 댄 망토, 금실 자수로 장식한 의상,

신발의 금은보석 장식은 제국의 부와 위대함을

드러낸다.

바닥의 융단에는 고대 로마의 군단과 카롤링 왕조의

상징인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6)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거장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첸시오(인노센트) 10세의 초상화는 모든

초상화의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작품이다.

당대의 다른 초상화와는 달리 인물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두툼한 코에 미간을 찡그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교황은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짜증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이 신성한 성직자라기 보다는

심술 맞은 표정을 한 고집 센 노인처럼 보이는 것에

심기가 불편해진 교황은 초상화가 '너무 사실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그림은 교황의 사저에 처박혀 200여 년이

지날 때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4년부터 1655년까지

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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