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엄 있고 용맹하며 성격이 강직한 관우는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천여 명의 인물 중에서 가장 멋진 인물로 칭송 받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를 비교해 볼 때 관우만큼 철저하게
미화된 인물은 없다. 제갈량도 상당히 미화되었지만 관우만큼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관우가 충(忠)과 의(義)의 전형(典型)일 뿐만 아니라
무예가 만 명에 필적할 만한 만인지적(萬人之敵)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과장된 부분이 많다.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천 년이 넘는
시대적 간극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은 지나치게 과대포장 되어
칠실삼허(七實三虛, 칠은 사실이고 삼은 허위)라고 하거나
심지어 삼실칠허(三實七虛, 삼은 사실이고 칠은 허위)라는 말까지 듣는다.
결국 소설 삼국지는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해
재창조한 소설일 뿐이며, 오랫동안 몽골족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한족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
살아서는 후(侯)였던 관우는 죽은 뒤에 공(公)이 되고,
그 다음에 왕(王)이 되며, 더 올라가서 황제(帝)가 된 다음,
결국에는 인간의 세계를 넘어서 신(神)이 되었다,
비록 많은 부분이 미화되고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관우의 일생이 전하는 메시지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관우는 산서성 운성 출신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다.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대의 염호 해지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당시 소금은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는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염상을 죽이고 고향에서 도망을 쳤다.
관우가 유비와 장비를 만나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을 다짐하는 도원결의는
소설 도입부의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정사에는 기록이 없다.
소설에는 관우가 사수관 싸움에서 술이 식기 전에 돌아 오겠다고 말한 뒤
동탁의 맹장 화웅의 목을 베어 와 중원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정사에는 실제로 화웅을 죽인 것은 오나라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겸이 죽은 후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자 조조는 북방의 최대 군벌 원소를
치기 전에 자신의 배후를 공격할 우려가 있는 유비부터 정벌하기 위해
서주로 진군했다.
조조의 공격을 받은 유비는 가족들도 거두지 못한 채 원소 진영으로 도망가
몸을 의탁했고, 장비는 망탕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었으며,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과 함께 조조의 포로가 된다.
이때 소설에서는 관우가 세 가지 조건을 내걸고 항복한다.
첫째, 자신은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고,
둘째, 감부인과 미부인 두 형수를 예우해야 하며,
셋째,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바로 떠나겠다고 하는
관공삼약(關公三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정사에는 없는 소설이다.
조조는 관우를 자신의 부하로 삼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고
열과 성을 다해 대우한다.
그러던 중 조조가 백마성에서 원소와 격전을 벌이며 고전할 때 관우가 나서
원소의 선봉대장인 안량과 또 다른 장수 문추를 연달아 죽이고는
낭중취물(囊中取物),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추를 죽인 것은 관우가 아니라 조조의 군사들이었다는 것이
정사의 기록이다.
관우는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당초 약속했던 대로
떠나겠다고 말했고, 조조는 어쩔 수 없이 관우를 보내준다.
이 때 관우는 유비를 찾아 가는 천리독행(千里獨行)의 여정에서
다섯 개의 관문을 지나며 조조의 장수 여섯 명을 죽인다.
소설에서는 이를 오관육참장(五關六斬將)이라 하여 관우의 무예와
그의 형님에 대한 지조가 빛나는 장면으로 멋지게 묘사되어 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닌 허구이다.
소설 삼국지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격전 장면은 적벽대전으로,
촉오 연합군은 조조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다.
이때 관우는 패주하는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지만
조조에게 신세 졌던 옛정을 생각해 그냥 보내준다는 것이 소설 속
조조와 관우의 또 하나의 극적인 스토리이다.
그러나 적벽대전에 관한 정사 기록은 조조가 장강의 수전에서
패해 철수했고, 퇴각하는 길이 나빠 고생하며 군사도 많이 잃었다는 게
전부일 정도로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철수하는 도중에 관우와 마주친 적도, 그에게 잡힐 뻔한 일도
기록에는 없다.
형주를 지키던 관우는 수공을 펼쳐서 번성의 조조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정사에 기록된 관우의 거의 유일한 승리 장면이다.
번성 전투에서 어깨에 독화살을 맞은 관우는 마량과 바둑을 두면서
명의 화타에게 뼈를 긁어 내는 수술을 받는다.
관우의 수술 기록은 정사에도 나오지만 화타는 그로부터 십여 년 전에
조조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으므로 실제로 관우의 어깨를 치료한 의사는
화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소설에서 관우는 청룡언월도로 수많은 적을 물리치지만
그 당시에는 언월도라는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송나라 때에 이르러
비로소 언월도가 생겨났다.
충의와 용맹을 바탕으로 한 관우의 성공은 교만과 아집을 불러와
그의 명을 재촉했다.
오나라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했지만
관우는 "호랑이 새끼를 어찌 개 새끼와 혼인을 시키겠는가?" 하며 거절해
손권의 분노를 샀고, 이는 손권이 조조와 연합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관우는 번성에서 위나라 조조의 군대에 패해 맥성으로 퇴각했지만
다시 오나라 손권에게 포로로 잡혀 참수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손권은 그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관우와의 옛 인연을 생각해
제후의 예로써 장례를 치러 주었다.
관우의 묘는 관림(關林)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 황제의 묘는 '릉',
성인의 묘는 '림'이라 부른다.
중국에 ‘림’ 자가 붙는 무덤은 공자의 공림(孔林)과 관우의 관림 두 개 뿐이다.
관우는 한대 제후에서 시작해, 송대 왕이 되고, 명대에 황제가 되었으며,
청대에는 성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충의와 무용의 상징인 무신(武神)임과 동시에
돈을 벌게 해주는 재신(財神)으로 모셔지는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관우 숭배사상은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통해
조선에도 전해졌으며, 조선은 궁궐 인근에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관왕묘(동묘)를 세우기도 했다.
무인 관우가 재물신이 된 것은 고향의 소금호수 덕분이다.
관우의 고향 사람들은 소금으로 명, 청대에 이르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관우를 신격화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즉,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관우를 신격화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가정은 물론 식당 같은 사업장에도
관우상을 모셔 놓고 매일 아침 공양을 올리며 가족의 안녕과 사업의 번창을 빈다.
뿐만 아니라 홍콩 경찰이나 마카오의 조직폭력배들 역시 출동하기 전에
관우상에 참배를 한다고 하니 흥미롭다.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 만든다고 한다.
필요에 따라 과장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하는 것이 역사이며,
관우 또한 그러한 역사적 필요성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배신과 권모술수가 생존의 방편이었던 난세에 관우가 보여준
충절 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관우를 추앙하는
이유도 그의 충절을 아름답게 보는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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