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식견과 안목을 가진 참모를 장자방이라 부르는
것은 장량에게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장자방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최고의 참모를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되다시피 했고,
조직의 리더들은 자신의 곁에 장자방 같은 인물을 두고
싶어 한다.
장량은 전국시대 한(韓)나라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방은 그의 자(字)이다.
유방의 책사가 된 장량은 개개의 전투가 아니라 전체
판도를 움직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큰 그림을 그렸으며,
유방이 항우를 누르고 천하통일을 하는데 크게 기여해
대장군 한신, 행정과 군수를 담당했던 소하와 함께
서한삼걸로 일컬어진다.
한(漢) 고조 유방은 장량에 대해 "군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다."며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장량은 초한전쟁 기간 중에 유방과 오랜 시간 같이
있으면서 그의 결정 하나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략에서는 유방보다 훨씬 뛰어났지만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않고
본분에 충실했다.
장량은 머물지 않고 떠날 때를 알았던 인물이다.
대장군 한신이 토사구팽의 죽임을 당한 것과는 달리
권력의 속성을 잘 아는 장량은 전쟁이 끝난 뒤 유방의
곁을 떠나 천수를 누렸다.
장량이 성공한 이인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냉철한 현실 인식과 절제된 처신
덕분이었다.
장량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무대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가 기울기 시작한 초한쟁패의
시대였다.
장량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조국의 복수를 위해
대담하게도 시황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그는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나 주나라 강태공이
지었다는 태공병법을 전수받아 지략을 더욱 높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방이 봉기하자 암살 실패 후 숨어 지내던 장량도
합류했고,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신뢰하는
좋은 군신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계책을 내게 된다.
초나라 회왕이 항우와 유방에게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먼저 점령하는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겠다고 하자
장량은 지략을 발휘해 유방이 먼저 함양에 입성하도록
도왔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궁궐의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여인들에 넋을 놓았다.
측근 장수 번쾌가 궁궐 밖으로 나갈 것을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이 나서 유방의 발걸음을 돌려 세운다.
良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
(양약고구 이어병, 충언역이 이어행)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유익하다.
유방은 장량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시 함양에서 나왔고,
백성들에게 살인, 절도, 상해 등 세 가지만을 규제하는
약법삼장을 발표해 진나라의 수많은 악법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유방이 함양에 먼저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단숨에 함곡관을 돌파하고 홍문에 진을 쳤다.
항우는 유방이 황제가 되려 한다고 생각하고 유방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당시 항우군은 40만 대군이었고 유방군은 10만에 불과해
유방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유방이 홍문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장량 덕분이었다.
유방은 약간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홍문으로 찾아가
항우에게 비굴할 정도로 몸을 낮춰 사죄하니 항우는
유방이 도저히 황제가 될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판단해
그에 대한 경계를 풀고 연회를 베풀었다.
항우의 책사 범증이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몇 번이나
보냈지만 끝내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줘 항우로서는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된 '홍문의 연회'가 되었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항우가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삼아 파촉의 오지로 보냈을 때도 장량은 잔도를 불태워
유방이 관중으로 나올 의사가 없음을 보이며 항우를
안심시켰다.
또한 항우의 관심을 제나라 쪽으로 돌려 유방이 재기할
시간을 벌게 했고, 군대를 정비한 뒤에는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며 몰래 진창을 넘어 관중지역을 평정토록
했다.
유방 휘하의 대장군 한신은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는데, 제나라를 평정한 뒤 유방에게 전령을 보내
지역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필요하니 자신을 제나라의
가왕(假王, 임시왕)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유방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옆에 있던 장량이
유방의 발을 꾹 밟고는 한신을 가왕이 아니라 진왕
(眞王)으로 임명하라고 조언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유방은 곧바로 전령에게 "사내가
가왕이 뭔가, 이왕이면 진왕을 해야지!" 라고 말하며
국면을 수습했다.
제나라의 진짜 왕이 된 한신은 유방의 통 큰 인사에
만족해 하며 이후 유방에게 적극 협력하며 충성했다.
만일 이 장면에서 유방이 한신을 제나라 왕에 임명하는
것을 거절하고 그와 사이가 벌어졌다면 유방의
천하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유방과 항우는 홍구에서 협약을
맺고 서로 철군하기로 했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팽성을 향해 떠나자
유방도 회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은 지금 천하의 형세가 한나라에
유리하며 초나라는 지치고 군량이 떨어졌으니 그들이
퇴각할 때 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유방과 한신의 대군은 퇴각하는 항우군을 추격해
해하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전의를 상실한 초나라
군사들과 항우를 격퇴하고 마침내 초한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자 한 고조 유방은 장량에게 제나라 땅에서
식읍 3만 호를 고르라고 했으나 장량이 사양하며
받지 않자 유방은 그를 유후(留侯)로 책봉하고, 소하와
마찬가지로 1만 호의 봉토를 주었다.
유후가 된 장량은 신병을 이유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다가 얼마 후에는 완전히
은퇴해 장가계로 들어갔다고 한다.
장량은 계책 뿐만 아니라 인생관이나 처세술 또한
지혜로웠다.
장량의 사당에는 '멈출 때를 안다'는 '지지(知止)'와
'공을 이뤘으면 몸은 물러난다'는 노자 도덕경의 '
공성신퇴(功成身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천 년 넘게
변하지 않는 생존의 지혜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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