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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단상

혼백(魂魄), 하늘과 땅의 기운

물아일체 2018. 6. 13. 23:48

제사를 지낼 때 제주(祭主)는 먼저 향을 사르고

모사기에 강신주를 따르는데, 오늘날 이러한 의식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향을 피우거나 강신주를 따르는

절차를 생략하기도 한다.


전통적 음양론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는 하늘의

기운인 혼()과 땅의 기운인 백()을 받아 나온다고

한다. , 혼과 백 두 기운이 합쳐져 사람이 되고,

이 둘이 조화를 이뤄 양의 기운인 혼은 정신적인 일을

하고, 음의 기운인 백은 육체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혼은 소프트웨어, 백은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혼과 백은 한 덩어리지만 죽으면

다시 나뉘어져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혼은 하늘로 날아 올라 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들어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매우 놀라서 넋을 잃었을 때 혼비백산

(魂飛魄散) 했다고 말하는 것도 여기서 유래된

표현이다.

제사 때는 혼과 백을 함께 모시기 위해 향을 피우고

모사기에 술을 붓는다.

향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서 조상의 혼을 모셔오고,

모사기의 술은 땅으로 스며들어 백을 불러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이 늙거나 오랜 투병생활로 심신이 쇠잔해지면

그 동안 몸 안에 합쳐져 있던 혼과 백은 서서히 분리해서

떠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혼과 백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그 순간을

"죽었다",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생사를 주관하고,

죽은 사람들의 혼이 머무는 별이라 하여 신성시했다.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시신을 올려놓는 판을 칠성판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전통 장례에서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북쪽을 향해 망자의 옷을 흔들며

큰 소리로 "()!, ()!, ()!"을 외쳐 북두칠성을

향해 떠나가는 망자의 혼을 다시 돌아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 의식이었다.

그럼에도 망자가 소생하지 않으면 본격적인 장례절차를

진행했다.


사람이 교통사고 또는 전쟁이나 익사, 살해 같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갑자기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혼과

백이 미쳐 분리할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의

원인에 의해 비정상적, 강제적으로 분리가 되면 혼과

백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혼백의 억울함을 위로하기

위해 무속인을 불러 씻김굿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자신의 저서 불씨잡변(佛氏雜辨)

통해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하면서 혼과 백의 분리를

나무가 불에 타는 것에 비유해 설명했다.

"나무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나고 재가 남는다. 연기는

혼이요, 재는 백으로 불이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불이 꺼져 버린다고 연기와 재가 다시 합쳐져

나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죽은 뒤에 혼과 백이

다시 만나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불교에서의 윤회

(輪廻)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죽은 뒤 땅으로 돌아간 백은 3년이면

완전히 흩어진다고 생각해 3년 동안 망자의 묘 근처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했다.

반면에, 하늘로 올라간 혼은 완전히 흩어지는데 훨씬 더

시간이 필요해서 대략 100년 정도가 걸리는 것으로

보았다. 그 기간은 대체로 4세대 정도에 해당하는

기간임을 고려해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4대 봉사(代奉祀)의 전통이 생겼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4대 봉사를 하는 것은 옛날 가족제도를 고려할

제주가 고조부모까지는 얼굴을 마주하며 같이

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이 좀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요즈음에야 증조 고조부모 얼굴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십대 때 혼인을 하는 조혼풍습이 보편적

이었던 옛날에는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꾸짖을 때 “혼내줄거야” 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몸에서 혼을 빼낸다고 하는 무서운

말이다. 부모가 아이를 야단칠 때도 이런 말을 쓰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함부로 쓸 말은 아닌 것 같다.


혼백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판단에 따른 자유이다.

다만 혼백이 음양론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동안

선조들의 삶과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던 우리 문화의

일부라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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