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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묘비문을 통해 본 명사들의 삶 / 작곡가 윤이상

물아일체 2024. 3. 4. 00:00

묘비문은 치열했던 한 인간의 삶의 기록이다.

재치와 유머가 담긴 촌철살인의 문장,

조금은 엉뚱한 글귀의 묘비문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묘비문도 눈에 띈다.

 

다양하게 표현된 명사들의 묘비문을 통해

그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했던

메시지와 그들의 삶을 살펴 본다. .

 

 

"處染常淨" (처염상정)"

(처한 곳은 더럽게 물들어도 늘 맑고 깨끗하다.) 

 

통영국제음악당에 자리 잡은 윤이상(1917 - 1995년)의

묘비문 글귀이다.

윤이상의 이름 앞에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고국을 그리워하다

베를린에서 잠든 사람' 등의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윤이상은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되었다.

1943년에는 항일지하활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감금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52년까지 통영과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53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경희대,

숙명여대 등에서 본격적으로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1956년 39세의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나

프랑스와 독일에서 작곡 공부를 했다.

독일의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고, 베를린에 정착한 뒤 유럽에서 주목 받는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윤이상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7년

동베를린 간첩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독일 정부와 세계 여러 나라 음악가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 뒤 독일로 귀화했다.

1972년에 뮌헨 올림픽에서 오페라 <심청>을 무대에

올리며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윤이상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이 충만한 독특한 선율로

현대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는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분단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1990년 10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 통일음악제’ 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합동공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윤이상은 1995년 11월 3일 베를린에서 타계해 현지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 후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의 유해는 2018년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돌아왔다.

통영에서는 해마다 윤이상 국제음악회가 열린다.

 

 

 

남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통영국제음악당 뜰에

그의 묘석이 있다.

그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너럭바위 묘석에 새겨진

묘비문 '처염상정(處染常淨)'은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도 항상 맑고 깨끗한 연꽃을 이르는 글귀로,

처한 곳이 더럽게 물들어도 항상 깨끗함을 잃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