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 했다."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
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
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은 모두 적의 깃발 아래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아들 면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던 날,
나는 군무를 폐하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덜 삭은 젖내가 나던 면의 푸른 똥과
면이 돌을 지날 무렵의 아내의 몸냄새를 생각했다...
몸 깊은 곳에서 치솟는 울음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밀려내려 갔던 울음은 다시 잇새로 새어 나오려 했다."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은 죽음이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포로들은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울음을 울고 있었다.
그들을 울게 하는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우는 그들의 울음과
그 울음이 서식하는 그들의 몸은 개별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 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송희립은 내 갑옷을 벗기면서 울었다.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사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 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몸은 희미했고 몸은 멀었고, 몸은 통제되지 않았다."
2001년 출판된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하던 1597년 무렵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까지 2년여의 이야기이다.
23전 23승, 세계 해전사상 유일무이한 전과를 올린,
이순신의 롤러코스터 같은 삶과 전쟁 속에서의
인간적 고뇌와 격정을 공감할 수 있다.
김훈 작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그 때 그 곳에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4월 28일,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그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다시 한번 기리게 된다.
人固有一死 (인고유일사)
死有重於泰山 (사유중어태산)
或輕於鴻毛 (혹경어홍모)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그 죽음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 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
클래식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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