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人事) 즉, 사람을 쓰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조직을 움직이는 핵심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安危在出令 存亡在所用
(안위재출령, 존망재소용)
나라의 안위는 어떤 정책을 내느냐에 달려 있고,
나라의 존망은 어떤 사람을 등용하는가에 달려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글귀이다.
군주에게는 훌륭한 신하가, 기업의 최고경영자에게는
능력 있는 참모가 나라와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五請伊尹 (오청이윤)
상나라를 세운 탕왕이 이윤을 맞아 들이기 위해
다섯 번이나 사람을 보내 청했다는 뜻으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탕왕은 이윤의 보좌에 힘입어 폭군인 하나라 걸왕을
물리칠 수 있었다.
오청이윤은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군 가운데는 한 때 자신을
반대하거나 경쟁자의 편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사람 조차도 신하로 포용한 경우가 있다.
주군의 자리를 놓고 형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제 환공은 형의 측근으로 자신에게 활을 쏘았던
관중을 처음에는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제 환공은 포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중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후 제나라는 관중의 탁월한 정치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에 성공했고, 제 환공은
춘추시대 첫 번째 패주(覇主)가 되었다
당 태종 이세민은 형인 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
당 태종이 그런 패륜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훌륭한 치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위징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징은 형인 이건성의 신하로 이세민을
죽여야 한다는 조언를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당 태종은 위징을 자기의 신하로
기용했다. 바른 말 하는 강직함을 높이 산 것이다.
위징이 죽었을 때 당 태종은 슬퍼하며 말했다.
"나에게는 세 개의 거울이 있었다.
하나는 내 의관을 바로잡는 청동거울이요,
두 번째는 흥망성쇠를 살필 수 있는 역사라는 거울이요,
세 번째는 위징이라는 거울이다.
그 동안 위징을 통해 나의 행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데 지금 그 거울이 깨졌으니
앞으로 무엇으로 나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황희는 조선 태종 때 대사헌, 병조, 예조, 이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태종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후일 세종이 된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을 갔다.
임금이 된 세종은 황희를 다시 조정에 불러들여
기용했다.
세종이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황희를 신하로
쓴 것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소신껏 자신의 뜻을
말할 수 있는 경험 많은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희는 왕과 중신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초 비서실장으로 발탁한
김우식 당시 연세대 총장은 보수를 자처하는
인사였을 뿐 아니라, 노 전 대통령과는 생면부지의
관계였다.
하지만 ‘진보 대통령’과 ‘보수 비서실장’은 1년 6개월간
호흡을 맞췄는데, 김우식 전 총장이 최근 한 신문에
비서실장을 맡게 된 스토리를
소개했다.
"청와대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 노 전 대통령과 식사를
하는데,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와서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
사양하면서 ‘사실 저는 대선 때 노 대통령님을 찍지도
않았다’고 말했더니 노 대통령은 웃으며 ‘대학 총장 가운데
비단 김 총장님만 저를 안 찍었겠습니까’ 라고 하더라.
노 대통령의 그런 소탈한 모습에 호감을 갖게 돼 결국
비서실장을 맡게 되었다."
인사를 하면서 자신과 코드가 맞는 사람만을 고집하거나
인사를 논공행상의 수단으로 삼는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이다.
인사만사(人事萬事)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인사망사(人事亡事)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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