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사람의 소설가로서 이곳 예루살렘 시를
방문했습니다.
달리 말해, 능숙하게 거짓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이곳에 왔다는 뜻입니다.
물론 소설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 정치가도 곧잘 합니다.
외교관이나 군인도 거짓말을 합니다.
중고차 판매원도 정육점 주인도 건축업자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소설가의 거짓말이 그들이 하는 거짓말과
다른 점은 거짓말을 해도 도의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짓이 크면 클수록, 교묘하면 교묘할수록
소설가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듣고 호평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소설가는 뛰어난 거짓말을 함으로써,
현실에 가까운 허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진실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어내고 그곳에 새로운 빛을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꾀어내 허구가 있는 곳으로 옮겨놓고, 허구의 형태로
치환하여 진실의 끝자락이라도 붙잡으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 안에 진실의
소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뛰어난
거짓말을 하기 위한 중요한 자격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거짓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최대한 정직하고자 합니다.
나도 일년에 며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오늘이 우연하게도 그중 하루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을 쓸 때 늘 마음속에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늘 그 알의 편에 서겠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벽이 옳고 알이 그르더라도,
나는 알 편에 설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다른 누군가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은 시간이나 역사가 결정할 일입니다.
혹시라도 소설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벽 쪽에 서서
작품을 썼다면, 과연 그 작가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자 그럼, 이 은유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떤 경우에는 단순명쾌합니다.
폭격기, 전차, 로켓탄, 백린탄, 기관총은
높고 단단한 벽입니다.
그것들에 짓눌리고 불타고 총상을 입는 비무장 시민은
알입니다.
그것이 이 은유의 한 가지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십시요.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 하나의
알이라고.
더없이 소중한 하나의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라고.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벽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시스템’입니다.
본래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저 혼자 작동하여 우리를
죽이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살해하게
만듭니다.
냉혹하고 효율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 실려 있는 2009년
‘예루살렘 상’ 수상 소감문’의 일부이다.
'예루살렘 상'은 2년마다 열리는 예루살렘 국제
도서전에서 수여하는 문학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을 받던 2009년에는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빌미로 가자 지구를
과격하게 공습하면서 세계적으로 비난의 여론이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시상식에 참여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그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꼭 말해야겠다고 하면서 시상식에
참석했고, 그때 했던 연설이 이 수상 소감문이다.
훗날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이 한 수상 소감문이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발언으로서는 가장 아슬아슬한
것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제목 그대로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모은 산문집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의 가치관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감각적이면서도 고요한 문체와
철학적인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주는
글을 쓰는 작가로 명성이 높은 현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지난 천 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한 바 있다.
1987년 발간된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은
4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명작 속의 명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명작 속의 명문 /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1) | 2026.01.08 |
|---|---|
| 명작 속의 명문 / '이어령의 말' (5) | 2026.01.01 |
| 명작 속의 명문 / 김훈의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2) | 2025.12.04 |
| 명작 속의 명문 / 윈터링(Wintering, 겨울나기) (3) | 2025.11.20 |
| 명작 속의 명문 / 장영희의 '내가 살아보니까' (0) | 2025.11.06 |